베를린 장벽 붕괴는 ‘준비된 사건’이었다
  • 조명진 | 유럽연합 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09.11.1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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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라이프찌히 니콜라이 교회의 비폭력 평화 시위가 촉발제 역할 / 빌리 브란트·겐셔 등 서독 고위층과 동독 지도자들의 ‘신뢰 형성’도 중요한 밑거름 돼

▲ 지난 11월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행사에서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장벽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던 대형 도미노들이 쓰러지면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재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1월9일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0년을 맞았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두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명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라고 분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예상되고 준비된 사건’이었다.

영국 처칠 총리가 공산주의 진영과의 극단적 대립을 ‘철의 장막’이라고 부르며 예견한 것은 1946년이었다. 2차 대전 승전국이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대 강대국 사이에 ‘베를린 봉쇄(Berlin Blockade: 1948년 6월24일~1949년 5월11일)’ 직전까지 눈에 띄는 군사적 대립은 없었다. 하지만 베를린 봉쇄 기간 중 연합군이 공중으로 물자를 공급할 때 소련 전투기들이 연합군 수송기의 항로로 들어와 위협한 사례가 있었다. 냉전의 기원은 이 베를린 봉쇄 사건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1955년 소련은 미국이 주도한 서방 집단 안보 체제인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에 맞서 공산 진영의 집단 안보 체제로서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창설해 세계 질서를 양극 체제로 갈랐다. 냉전의 본격화였다. 실제로 베를린을 동서로 나눈 베를린 장벽은 1961년에 세워졌다. 베를린 장벽은 한 도시를 둘로 나눈 것만이 아닌, 민주 진영과 공산 진영을 분명하게 양분하는 냉전의 상징이었다. 그 베를린 장벽이 1989년 11월9일 무너져내린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20년 전을 회고하면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의 관에 박은 마지막 못(the last nail in Cold War’s coffin)’이라고 표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일등 공신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고르바초프의 이같은 표현은 그 자신이 일련의 사건들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1985년 소련 지도자 자리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가 파탄에 빠졌음을 인식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개방과 개혁을 주도했다. 장차 다가올 세계 정세를 전망한 그의 개혁적 생각은 단순한 정치 언변이 아니라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문제에 개입하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하겠다고 천명하고 중부 유럽에서 소련군을 철군하는 등의 실질적인 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소련의 새로운 외교 정책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이바지했다. 1986년 10월 레이카비크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1987년 12월 워싱턴에서 두 정상은 중거리 핵미사일(INF) 감축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레이카비크 정상회담 전까지 양국 정상은 6년간 만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이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와 워싱턴을 오가며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것은 동서 대결에 데탕트(해빙)를 가져온 구체적인 진전이었고, 동독과 서독의 관계 개선에도 도움을 주는 외부 환경을 제공했다.

냉전 종식에 따른 외부 환경 변화도 한몫

▲ 지난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행사장에 나란히 선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앞줄 왼쪽)과 메르켈 독일 총리(가운데),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앞줄 오른쪽). ⓒ연합뉴스

독일 통일 문제와 관련해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역사적 연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1987년 6월12일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연설에서 “자유는 번영에 이르게 하고, 자유는 국가 간의 오래된 증오를 일치와 평화로 바꾸어주므로 자유가 승자입니다. 당신이 평화를 찾고, 소련의 번영을 추구한다면 이리로 와서 이 문을 열어주시오! 고르바초프 씨,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려주시오(tear down this wall)”라고 요청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이 텔레비전 연설이 동독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동독인들은 깨닫게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브란덴부르크 문 연설에 대한 답신으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8년 12월7일 뉴욕의 국제연합(UN) 연설에서 무기 감축과 동구에서 철군을 이행하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세계가 바뀌었으므로 국제 정치에서 국가 관계의 본질 또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관계가 증진되어 세계에 안도의 숨을 쉬게 합니다”라고 하면서 연설 마무리에서 “나는 우리 국민들과 세계에 책임감을 느낍니다. 새해(1989년)에는 우리 모두가 많은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세계에 일대 변혁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1989년 10월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서 호네커 동독 서기장의 초청으로 동독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이미 커다란 변화를 예견했다고 했다. 퍼레이드 중 동독 참가자들은 고르바초프에게 독일 통일에 대한 결정을 내리라고 촉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이를 보고 고르바초프는 동독 국민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음을 목격했다고 한다.

동독인들의 항거가 유혈 없이 동독 공산당 정권을 흔든 까닭

▲ 11월9일,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긴 베를린 장벽 앞에서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길게 늘어서 있다. 이날 전세계 정치인들이 기념식에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연합뉴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또 다른 이유는 동독 민초들의 내부 항거에 의한 것이었다.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평화기도회는 평화 시위였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불러온 촉발제였다. 니콜라이 교회의 크리스티안 푸어러 담임목사는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평화기도회를 주도해왔다. 이 월요 평화기도회에는 동독의 개신교인들 뿐만 아니라 공산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사람들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정치 집회로 발전한 이 기도회를 차단하고 10월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를 잡음 없이 치르기 위해 호네커 서기장은 니콜라이 교회를 봉쇄했고, 참가자를 체포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발로 10월9일 월요 평화기도회 참가자 수는 7만명으로 늘어났고, 동독 비밀경찰 스타지는 동독 언론사의 취재를 막았다. 시위 군중 가운데 진압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면 유혈 진압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양손에 촛불을 든 시위 참가자들은 끝까지 비폭력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서독 텔레비전이 라이프찌히의 비폭력 민주화 촛불 시위를 취재하고 방송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 방송을 서독 시청자뿐만 아니라 동독인들도 보고 민주화운동에 고무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동독 호네커 정권은 비록 정치적 집회의 자유는 제한했지만, 종교의 자유와 언론 청취와 시청의 자유를 막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당시 동독은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개방된 사회였고, 현재의 중국보다도 열린 사회였다.

동독 국민들은 1989년 6월, 중국의 민주화운동이 처참하게 유혈 진압된 것에 대해서 같은 일이 동독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는 최악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천안문 사태가 끝난 뒤, 동독의 일간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군사 행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1956년의 헝가리 의거와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의 악몽도 구세대 동독인들에게는 선명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동독의 혁명은 글라스노스트와 동독 개신교회의 역할 덕분에 평화적으로 끝났다. 이를 두고 독일국제안보연구원(SWP)의 중국 전문가 바커 박사는 중국은 동독처럼 소련의 위성국가가 아니어서 고르바초프의 개방과 개혁의 효과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1989년 5월 중·소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고르바초프의 베이징 방문은 중국 지도부에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시위대들이 천안문을 막고 고르바초프를 사회주의의 대단한 개혁가라고 칭송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번 20주년 행사 때 중국 정부는 중국 인민들이 베를린 장벽 붕괴를 축하하는 웹사이트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다고 전한다. 그 이유는 중국 내의 민주화 요구를 부추기는 결과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한편, 겐셔 전 서독 외무장관은 독일 텔레비전 도이체 벨과의 인터뷰에서 1989년 9월30일 프라하에서 일어난 서독 대사관 사태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당시 동독을 탈출한 4천명의 사람들이 망명을 신청한 상태였다. 그때 겐셔 외무장관이 그들을 직접 만나 서독으로 가도록 동독과 합의된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합의는 소련 세바르드나제 외상, 동독 피셔 외무상이 동의한 것이었다. 관계국 실무 장관들 간의 신뢰가 바탕이 된 협상이었다. 이 결과 10월1일과 8일 사이에 14회에 걸쳐 1만2천명의 동독인들이 기차를 타고 서독으로 넘어왔다. ‘자유 열차(Freedom Train)’라고 이름 붙인 이 기차 수송은 민주화 혁명의 상징이었다. 4주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년 남짓한 기간에 동독 공산당 정권도 몰락했다.

냉전이 종식되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것은 아직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유발한 요인을 보면, 먼저 당사국 지도자들 간의 신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 간 화해를 위해 당사국 지도자들 간의 만남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마련된 것이 기본 요건이었다. 바로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대통령이 그랬고, 외교 실무를 맡은 겐셔 장관과 피셔 외무상이 그랬다.

그리고 둘로 나뉜 독일을 통일로 이끈 데는 무엇보다도 분단 독일의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의 지도자들이 공감대를 형성해나간 것이 주효했다. 그 시작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 간의 만남이었다. 특히,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을 이해하고 실천한 겐셔 외무장관의 역할이 컸다.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겐셔 장관 스스로가 동독 출신으로 1952년 서독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즉, 겐셔 스스로 공산 체제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유에 대한 갈구를 경험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동독 외무상을 만날 때 더 허심탄회하게 대할 수 있었다. 둘째, 겐셔는 외무장관직을 1974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역임했다. 오랜 세월 외무장관에 있었던 만큼 정책의 일관성과 전문성을 지닐 수 있었다.

이와 비교하면 한국의 경우는 대조적이다. 1945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래 1994년까지 김일성 주석과 첫 화해 무드를 연출한 것은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권력을 승계한 후, 화해 제스처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과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었다. 2회에 불과한 정상회담의 장소도 두 번 모두 평양이었다. 한국의 대통령 임기는 5년 단임제이다. 이 점에서 정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대북 정책이 나오는, 일관된 정책을 펴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은 독일인들에게 합치기를 희망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게 만들었다. 반면, 서독의 동방 정책과 비슷한 시기인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은 정권 유지 차원에서 필요했었고,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연속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독일과 한반도 상황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독일은 동족 간의 무력 분쟁이 없었지만, 남북한은 6·25 전쟁을 통해 총칼을 들이댄 적대적 관계였다는 점이다. 북한의 경우 개방된 동독 사회처럼 북한 인민들 스스로의 변화시도도 기대하기 힘들다. 이 점에서 남북 간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대북 정책 기조와 함께 독일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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