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경제공동체’ 무 르익는다
  • 이수훈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장·전 동북아시대위? ()
  • 승인 2009.10.2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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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협력에 기반한 통합 및 공동체 구축 논의 활발…남북한 화해·협력 더욱 시급해져

▲ 이명박 대통령이 10월10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운데),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오른쪽)와 한·중·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손을 맞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전세계적인 탈냉전 흐름에도 동북아에서는 아직도 냉전 체제가 해체되지 않았다. 특히 냉전 구도가 부분적이고 비대칭적으로 해소된 것이 동북아 지역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동북아의 주요 세력은 미국·중국·일본인데, 이들 간에는 노골적인 갈등과 적대감이 해소되었고 상호 협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미·중 간 범세계적 패권 경합과 중·일 간 역내 패권 경쟁이 은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협력이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북한은 여전히 냉전 구도 아래 있다. 한국은 탈냉전의 흐름에 따라 공산 진영의 핵심 국가였던 중국과 1992년 관계 정상화를 이루어냈다. 한·중 관계 정상화는 동북아 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관계 정상화 20년이 되기도 전에 한·중 관계는 여러 면에서 강력한 유대를 보이고 있다. 경제적 상호 의존성은 날로 심화되고 사회문화적 교류도 매우 활발하다. 이 점이 탈냉전기 동북아 정세의 핵심으로 주목해야 할 요소이다.

그런 반면 북한은 어떤가. 북한은 미국과 냉전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와 대립각을 이루고 있다. 경제는 봉쇄당하고 정치적 고립도 심각하다. 북한은 동북아의 미아로서 체제 안전과 생존을 위해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는 전략을 견지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냉전 체제를 해소해야 핵문제를 비롯해 북한 문제와 한반도 문제가 해결된다. 이같은 부분적이고 비대칭적인 냉전 체제의 해소에 대해서는 중국에게 가장 유리한 측면이 있다. 중국은 한국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어 유대를 강화해나가는 한편, 북한과는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중국은 이 양면적 관계를 통해 역내 핵심 세력으로서의 입지를 넓히고 위상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 시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어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생각할 수 없다. 최근 북한의 대중국 쏠림 현상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요구할 수준에 이르고 있다.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의 위상도 날로 높아져 이제 중국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는 6자회담의 가동과 진전이 어렵게 되고 있는 형편이다.

냉전 시기 동북아 지역에서는 양자 관계가 위력을 발휘했다. 아직도 미국을 중심으로 군사동맹이 작동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통해 강력한 유대를 보이고 있다. 이는 1990년대 들어 급속한 패권 약화를 겪어온 미국의 지역 전략과 맞닿아 있다. 미국은 탈냉전 시기 세계 전략을 구사하면서 동북아 역외 세력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 및 한국과 동맹을 강화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중국, 동북아에서 미국의 독주 밀어내고 다자주의 시대 열어

▲ 이명박 대통령이 9월25일 미국 피츠버그 컨벤션센터에서 G20정상회의를 마친 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동맹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미국의 패권이 약화하는 그 자체를 무효화할 수는 없다. 미국은 부시 행정부 8년 동안 대량살상무기 및 테러 확산 방지를 위해 전세계적인 개입 전략을 펼친 결과, 국력의 심각한 출혈과 도덕적 자산의 유실을 겪었다. 미국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거리를 두고자 하는 국가들이 생겨나고 있다. 미국 헤게모니 체제에 심각한 훼손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비해 중국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고도 성장을 토대로 전세계적 우호 외교를 구사했다. 빈국들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개도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강대국들과는 협력주의 기조로 일관해 불필요한 갈등이나 마찰을 피했다. 특히 동북아에서 위상을 고조시켜왔다. 북핵 문제가 나오자 6자회담 틀을 만들어 의장국 역할을 해냈다. 미국이나 한국과는 정책 조율자로서 입지를 만들고 북한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강화했다.

동북아에서 미국의 패권이 약화하는 것과 중국이 급속하게 부상하는 것은 다자주의(multilateralism) 등장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북핵 위기가 북·미 양자 협상을 통해 종결된 데 반해 2002년 제2차 북핵 위기는 6자회담에 의해 다루어져왔다는 점이 동북아 지역에서 떠오르는 다자주의에 관한 근거를 이룬다. 6자회담의 내재적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6자회담이 역내 어느 세력에 의해서도 부정되지 않는 현실은, 떠오르는 다자주의의 반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와 더불어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동북아의 다자주의 기운은 한층 더 탄력을 받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조하는 가운데 양자 동맹의 유지와 더불어 다자주의 정신에 기초한 동아시아 안보협력체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 역시 동북아 지정학의 변화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미국의 독주만 끝난 것이 아니라 양자 관계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다자주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반세기가 넘는 자민당 체제를 마감하고 하토야마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 동북아 지역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대등성을 확보하고 이웃 국가들과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동체를 구축하겠다는 노선을 천명했다. 북·일 수교회담도 재개될 것으로 예견되는 가운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동북아 다자 협력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 

경제적 상호 의존성 날로 커져 통합 여건 이미 형성

냉전의 벽이 무너짐에 따라 동북아 국가들은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한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 날로 커져왔다. 한·중·일 3국은 긴밀한 분업 체제로 상호 의존성을 높여나가고 있다. 중국의 경제 규모와 역내 경제 협력 증대로 인해 중·한, 중·일, 중·미 간 경제적 연계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당연히 역내 교역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동북아의 비중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역내 상호 의존도도 매우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탈냉전기인 1990년 이후 현재까지 통계를 살펴보면 동북아의 역내 교역이 동북아 전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꾸준하게 증가해왔음을 알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감소한 때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현재는 홍콩을 포함해 계산할 경우 유럽연합이나 NAFTA와 거의 대등한 수준에 이른다.

그리고 한·중·일 3국에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달러가 중앙은행에 비축되어 있다. 이런 자본력을 배경으로 하여 미국발 금융 위기를 맞아 한·중·일 3국의 금융 통화 협력에 대한 정치적 동기가 표출되어왔다. 1997년 외환위기 때의 경험을 공유한 것을 배경으로 ‘치앙마이 구상’에 따른 동북아 중앙은행 간의 협력도 강화되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이같은 선례를 확대하고 심화시켜 역내 금융 통화 협력을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했다. 2008년 12월15일 후쿠오카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은 금융 위기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데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지를 모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2009년 10월10일 베이징에서 열린 3국 정상회담에서 이같은 움직임에 대한 공동의 인식이 재확인되었다. 일본의 하토야마 정부가 출범한 이후 이 지역에서의 통합 및 공동체 구축 과제는 새롭게 탄력을 받고 있다.

동북아 국가들은 상호 간 교역의 증대, 투자의 급증, 금융 통화 협력 증대, 인적 자원의 대량 이동 등의 지표로 미루어볼 때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넘어 이미 통합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북아 역내 국가 간 협력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이고, 통합은 이전보다 더한 속도로 전개될 개연성이 커지고 있다. 지리적 근접성을 활용해 거래 비용을 줄이는 지역 통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과거 유럽에서 구축되어 유럽통합의 강력한 추동력을 제공한 ‘유럽경제공동체’(EEC)를 본받아 ‘동북아경제공동체’가 출범할 수 있는 여건이 무르익고 있다.

경제공동체를 구축하는 환경만 좋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안보 분야에서도 공동체적 협력 메카니즘을 만들자는 정치적 의지가 나타나고 있다. 6자회담 과정에서 합의된 ‘9·19 공동선언’과 ‘2·13 합의’에 이것이 명시되어 있다. 미국이 매우 적극적이다. 미국이 기존의 양자 동맹에 더해 병렬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동북아 안보공동체 구축에 적극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바로 변화된 동북아 지정학을 반영해주고 있다. 10년 전에는 상상하기조자 어려운 사태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6자회담 틀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한다면 그것을 토대로 동북아 안보협력체를 제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동북아 지역 차원에서 냉전 체제가 불완전하고도 비대칭적으로 해소되고 있다는 사실, 다자주의가 등장하고 있다는 흐름, 경제 분야와 안보 분야에서 공동체가 구축되는 분위기 등은 한반도의 남북 관계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 반대 방향으로 한반도의 남북 관계 성격이 동북아 지역 차원의 움직임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쌍방향적 인과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지난 10여 년에 걸쳐 펼쳐진 남북 화해 협력 정책에도 현재 남북 관계는 긴장과 갈등 관계이다. 이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집착에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이 결합된 점과 무관하지 않지만, 동북아 탈냉전 프로세스가 미결된 구조적 환경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북핵 문제는 미궁에 빠진 가운데 한반도의 핵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 다자 틀인 6자회담은 사실상 붕괴되어 있는 실정이고, 북·미 간 양자 협상이 선행될 것 같은 흐름도 있다. 이 역시 동북아 지정학의 유동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한국, 북핵 문제가 걸림돌이지만 치우치거나 쏠려서는 곤란

▲ 지난 6월4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북핵 실험 규탄 범국민대회에서 주최측이 설치한 북한 미사일 모형 뒤로 각국의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연합뉴스

동북아 탈냉전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여기서 문제는 북한이고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다. 핵문제를 포함한 북한 문제가 해결되고 한반도의 분단 체제가 해소되어야만 동북아에 일고 있는 긍정적 움직임들이 그 지향점을 향해 순항해갈 수 있다. 지금은 북핵 문제를 두고 이 모든 움직임이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동북아 다자주의의 현실화를 이룰 수 없고, 지역 공동체를 구축할 수도 없다. 북한 문제에서 가장 큰 이해관계국은 한국이다. 핵문제가 악화되어 피해를 볼 개연성이 가장 큰 국가도 한국이고, 분단 상황이 지속되어 야기되는 피해도 한국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동북아에서는 협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핵심 강대국들인 미국·중국·일본이 서로 협력해야 할 처지에 있다. 어느 한 세력이 나서서 경쟁이나 대립 구도를 만들 수 없게 짜여 있다. 한국에게 상당히 유리한 구도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을 이같은 지역적 대세 속으로 진입시키는 과제도 막중하다. 여기에는 북핵 문제를 외교적이고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선결 요건이다. 한반도와 동북아는 이렇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한반도의 남북 분단이라는 단층을 메우지 않고는 동북아 냉전 구도를 청산할 수 없고, 냉전 구도가 청산되지 않으면 협력주의에 입각해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도 구두선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은 동북아 지역 차원에서 일고 있는 협력과 통합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 탈냉전 프로세스를 가속화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해야 한다. 다자주의 질서를 지지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와 기여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다. 경제·안보 분야의 공동체 구축에도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양자 관계 차원에서는 한·미 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되 중국 구상을 정립하고 일본과의 협력 관계를 진전시키면서 남북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치우치거나 쏠려서는 곤란하다. 동북아에서 남북 관계가 갖는 무게를 인식하고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남북 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야 한다. 남북 관계를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 외교 안보의 전반적 틀이 흔들리고 우리의 고유한 입지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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