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과 상처가 만든 파국
  • 이지선 | 영화평론가 ()
  • 승인 2009.10.2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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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한 편집·절제된 묘사·탄탄한 연기로 감정적 긴장 넘치는 수작

▲ 감독 | 박찬옥 / 주연 | 이선균, 서우, 심이영


처제와 형부가 사랑에 빠졌다. 그 사이를 매개한 언니(아내)는 죽고 없다. 그러나 “이 남자, 사랑해도 되나요?”라는 도발적 광고 카피를 보며 “뭐 어때! 즐겨!”라는 대답을 예상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은 어쩌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B급 에로영화에 더 잘 어울릴 법한 설정을 가진 <파주>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뜨겁고 끈적한 에로스를 그린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는 죄책감과 상처, 의심과 희생, 진실과 사실에 대한 복잡한 심경과 사유를 드러낸다.

재개발로 인한 철거 바람이 불어닥친 파주, 은모(서우 분)는 3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막 파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하나뿐인 가족, 언니(심미영 분)가 죽었다. 희부연 안갯속을 달려 돌아온 그곳에는 전직 운동권이자 언니의 남편이었으며 현재 철거민대책위원회를 맡고 있는 남자 중식(이선균 분)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두려워 도망친 은모와 그런 은모를 기다린 중식은 조심스럽게 가까워지지만 중식의 반복되는 거짓말에 은모는 언니의 죽음에 중식이 연관되었다고 직감한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죄책감과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어가던 두 사람은 결국 힘겹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예정된 파국은 피할 수 없다.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에서 가부장적 연대를 겪으며 ‘남자 어른’으로 성장하는 한국의 소년을 그려내 찬사를 받은 박찬옥 감독은 두 번째 영화에서도 장기를 그대로 살렸다. 그녀는 이야기하되 주장하지 않고, 세밀하게 그리되 전체를 보게 한다. 몇 개의 사건을 통해 두 사람이 겪은 8년의 시간을 축약해 보여주는 과감한 편집과 절제된 묘사는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며,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는 8년의 사랑과 갈등, 파국이라는 이야기에 현실감을 더한다. 자칫 흔하디흔한 치정 드라마로 빠질 수 있었던 애초의 설정은 재개발과 철거라는 절박한 사건, 그리고 ‘죽음’이라는 미스터리적 요소를 만나 이야기적 긴장을 획득했다.

순교에 가까운 중식의 결정은 애틋하지만 그것이 은모를 구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예수의 말처럼 은모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몰라서 좋을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과연 모르는 것은 행복인가? 모든 순교는 타인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가? 죄책감과 사랑, 어느 쪽이 더 무거운가? 영화는 그 모든 질문을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질문이 남기는 여운은 어떤 에로스보다 끈적하다. 영화 <파주>를 잊을 수 없는 이유이다. 10월2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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