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걷는 옛길 그곳에서 나를 찾는다
  • 신정일 | 여행가·‘우리 땅 걷기’ 이사장 ()
  • 승인 2009.09.2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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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가볼 만한 걷기 여행 코스 7선

▲ 울진 두천리 십이령 길


9월 중순에서 10월 말까지의 산천은 말 그대로 온통 잔치판이다. 자연이 만인을 위해 개최한 가을 축제가 절정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가지고 나가면 가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그 아름다움을 스스럼없이 나누어준다. 가을, 그것도 달이 가장 밝은 8월 한가위 무렵의 산천은 누구의 것인가? 가을 속으로 성큼 들어간 사람의 것이리라. 
유유히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과 문득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벗 삼아 걸어가면 좋은 길이 나라 안의 도처에 있다. 그 길이 사람들의 편리와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다가 다시 깨어나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추석 연휴를 맞아 ‘나라 안의 아름다운 옛길’ 몇 곳을 소개한다.


01 하늘과 산과 바다가 맞닿은 동해안의 관동대로 옛길
       삼척시 근덕면 용화리에서 원둑읍 호산리까지 약 20km

동해안에 아름다운 해수욕장 중 하나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의 용화 해수욕장이다. 이곳에서 바닷길이 아닌 산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원덕읍 임원리 절골에 이른다. 잘생긴 소나무 밑 당집이 있는 곳에서 산길을 지그재그로 넘어 호산까지 이어지는 길이 바로 서울 동대문에서 울진군 평해읍까지 이어지던 관동대로 옛길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길은 그냥 작은 옛길이었다. 추수를 끝낸 논배미들이 겹겹이 포개져 보이는 길은 휘돌아가고, 가을 산천이 온통 빨갛고 노란 단풍이 들었었다. 그런데 지난해에 임도가 개설되면서 고즈넉한 옛 정취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이 길은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한적한 길이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나뭇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보면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고갯마루에 이른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어온 골짜기 너머에 푸른 바다가 그림처럼 보이는 고갯마루에서 사기점까지 가는 길은 한적하면서도 정겹다. 옛 시절 절이 있었다는 절터골에서 호산으로 가는 길은 5만분의 1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옛길이다.

능선을 따라 이리저리 이어지는 길을 가다 보면 멀리 동해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겹겹이 포개져 달려오는 산들, 그곳에서 산길은 휘돌아가며 마치 ‘차마고도’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나타난다. 능선에 오르면 길은 두 갈래이다. 관동대로는 능선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고, 조금 내려가면 황희 정승의 공덕을 기려 세운 소공대비(召公臺碑)와 만난다.  이 비를 세운 뒤부터 임원항 서쪽에 있는 이 고개를 소공령고개라고 불렀다. 평해로 유배를 가던 이산해가 지은 시에는  ‘높고 높은 소공대에서는 멀리 울릉도가 역력히 보였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날이 맑은 날에도 울릉도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길, 하늘과 산과 바다가 맞닿은 길, 사람들은 가고 오지만 길은 남아서 그 옛날을 증언해주는 길, 관동대로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02 보부상의 애환 서린 울진 십이령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1리에서 서면 소광리까지 20여 km

한평생을 길을 걸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름하여 보부상이다. 선질꾼이라고 불리는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대표적인 고개가 울진군 북면 두천1리에서 시작되는 십이령이다.

두천1리는 민가 몇 채가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마을로서 서울로 가던 길목이라서 서울 나들이길이라고 불렸다. 선질꾼들은 2.7장인 울진장과 3.8장인 흥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 간어물, 미역 등을 구매해 쪽지게에 지고 ‘열두재’라고도 불리는 십이령을 넘었다. 사흘쯤을 걸어 봉화장에 도착했는데, 거리가 대략 1백30리 길이었다. 봉화장 주위에 있는 내성장, 춘양장 등 여러 장에서 잡화와 약초 및, 양곡, 포목 등을 그들이 가진 것과 바꿔 되돌아왔다. 선질꾼들은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있는 인가에 머무르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단지로 밥을 지어먹고 가기도 했다. 

그때  그 힘든 길을 걸어가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선질꾼들이 부르던 것이 <십이령 바지게꾼 노래>이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중략)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대마 담배 곡물 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평생에 내 지겐가,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나.”

 십이령은 역사에서 중요한 길이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적어서 그 흔한 펜션이나 슈퍼 하나 없다. 오직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산새 소리, 구름과 바람 소리밖에 없다. 어쩌다 자동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길, 아무데나 자리를 펴고 앉아서 흐르는 구름과 말을 건네기도 하고 냇물에 내려가 탁족을 해도 좋은 곳이 바로 십이령 고갯길이다. 숨이 가쁘게 고개를 넘어 천천히 걸어가면 보이는 마을, 서면 소광리이다. 나라 안의 이름난 소나무인 금강송 군락지가 있는 곳이다.

03 수많은 바위와 강물 소리 어우러진 섬진강 중류 강변 길
전북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에서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까지 약 19km

‘누이 같고 어머니 같은 강이다.’ 누군가 남도를 흐르는 섬진강을 두고 한 말이다. 그 말이 가장 합당한 곳이 섬진강의 중류인 일중리에서 평남리에 이르는 길이다.

일중리에서 천담리로 가는 길,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강 가운데 저마다 모습을 달리한 바위들이 들어앉아서 지나는 길손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 길을 걸어가면 천담리에 이르고  천담에서 구담은 제법 멀다. 강이 마치 하회마을처럼 휘돌아가는 곳 그곳이 바로 구담마을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은 하회처럼 크게 휘감아 돌고, 강으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너다 강물소리를 듣는다. 삼라만상이 내는 모든 소리(사랑을 속삭이는 소리, 탄식하는 소리 등)를 다 가지고 있다는 강물 소리에 마음이 빼앗겨 한참을 머물러도 좋으리라.

 저마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수많은 바위가 강을 수놓은 가운데 바라보면 볼수록 기묘한 바위가 요강바위이다. 요강처럼 뻥 뚫려서 큰 마을 사람들이 저녁 내내 싸도 채워질 것 같지 않다. 천천히 걸어가면 만나는 마을이 구미리이다. 구미리 거쳐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로 가는 길은 갈짓자로 걸어도 좋은 길이다. 그 길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무량산, 용골산 등의 산들이 강물에 옛이야기처럼 잠겨 있을 것이다.

04 병산서원 거쳐 하회마을 가는 호젓하고 아늑한 낙동강 길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서원에서 구담리까지 약 12km


누구나 하회마을을 간다. 그러나 하회마을과 인접한 병산서원을 가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가기는 가되 차로 가서 둘러보고 차를 타고 나오지, 걸어가는 사람은 없고, 하회로 걸어가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았는데, 나라 안의 서원 중 병산서원만큼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가는 산길이 얼마나 호젓하고 아늑한 길인지는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어쩌다 사람이 지나는 이 길, 수풀 우거진 이 길에도 패랭이꽃과 구절초꽃, 쑥부쟁이꽃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자랑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피어 있고, 강 건너 마을의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희미하던 길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그러다가 돌을 깎아서 길을 만든, 깎아지른 길을 지나기도 하는 길을 걷는다. 얼마 안 가서 임도가 나타나고 탁 트인 전망 좋은 곳에 이른다. 옛 시절에 닦아둔 신작로 길을 따라가면 고갯마루에 이르고 숲길을 벗어나자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 들판 끝으로 하회마을이 나타나며 멀리 부용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배를 타고 건너 부용대에 올라서 바라보는 하회마을과 낙동강 그리고 제방둑을 따라 구담마을에 이르는 길의 구담습지는 낙동강의 진수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구간이다. 

05 무위사에서 누릿재 넘어 영암으로 가는 길
전남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에서 영암읍 계산리까지 약 15km


강진 하면 떠오르는 절 하나, 바로 무위사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의 월출산 동남쪽에 있으며 대흥사의 말사인 이 절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죽전마을을 지나 월출산 자락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설록차밭이 펼쳐지고, 아릿한 차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걸어가면 월남리 탑정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보물 제298호인 월남사지 3층 석탑이 있다.

상월마을을 거쳐 나주와 영암으로 가는 13번 국도를 계속 걸어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영암읍 학송리로 이어지는 불치재와 영암읍 개산리로 이어지는 누릿재로 가는 길이다. 황토가 많다는 누릿재는 주로 소를 팔고 사는 우상인(牛商人)들이나 보부상들이 영암장, 나주장을 보기 위해 넘었던 길이다. 누릿재를 오르는 길의 초입은 시멘트 길이다. 드디어 시멘트 길이 끝나고 비포장 길이 나타난다. ‘황치(黃峙)’라고도 부르는 누릿재는 영암군 영암읍 개신리의 내동 남쪽에서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지형이 가파르지 않고 밋밋한 편이다.

고개를 넘으면 영암 땅이다. 다산과 추사, 우암이 넘었던 역사적인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수많은 길손이 넘었을 이 고갯길이 지금은 겨우 사람 두엇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 변산 마실길

06 파도 소리 벗 삼는 변산 마실길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새만금 전시관 바닷가에서 격포항까지 18km

‘둘레길’과 ‘올레길’, 지리산과 제주를 대표하는 길 이름이다. 마실길은 새만금에서 격포, 내소사 개암사, 구암리 고인돌 등 변산을 휘감아 도는 길 이름이다. 나라 안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는‘마을’의 방언인 마실은 ‘마을에 나간다’라는 뜻이다.

새만금 전시관이 들어선 서두터 마을의 30번 국도에서부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초소길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초소에서 초소로 이어지는 그늘이 마치 밀림을 연상시킨다.

부드러운 흙길과 까슬까슬한 모래밭이 펼쳐진 바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푸르고 파도 소리는 드높다.

합구마을을 지나 초소길을 따라서 가다가 바닷길에 접어들고 고개를 넘어서자 패총이 있는 대항리이다. 변산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초소길보다 바닷길이 더 운치가 있고 바닷가 길을 따라가면 변산 해수욕장에 이른다.

송포항을 지나 운산리로 가는 바닷가 산길은 파도 소리를 벗 삼아 걸을 수 있어서 일품이다.

한적하면서도 운치가 있는 운산 마을에서 고사포 해수욕장으로 길은 이어진다.

해수욕장 끝 부분에서 길은 제법 넓은 산길로 이어지고 도반들의 함성이 저절로 나온다. “이렇게 예쁜 산길이 우리 몰래 숨어 있었다니!“ 움푹 패인 초소 길을 따라가면 푸른 소나무와 백사장이 펼쳐진 고사포 해수욕장이 망초꽃 너머로 보인다.

소나무 숲에 들어서서 저마다 마음에 드는 소나무에 등을 기대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다가걸어가면 만나는 곳이 적벽강이다. 채석강과 달리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드문한 적벽강(赤壁江)에서 수성당(水聖堂)을 지나 채석강으로 가는 길은 가히 환상적이다. 간간이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나무숲울창한 마실길을 걷다 보면 “세상이 별 것이 아닌데”라는 말이 문득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

07 암행어사 박문수 묘가 있는 은석산
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서 병천면 병천리까지 약 9km

천안시 북면 은지리는 목천에서 병천으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동쪽에 있는 은석산에 암행어사로 이름이 높은 박문수의 묘가 있다.

은석골 입구에 도착하자 보이는 집 한 채가 고령 박씨 제실이다. 집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서 은석산으로 오르는 길은 언제나 걸어도 정겹다. 길 아래에 작은 내가 흐르는 길은 급경사 오르막길이 없어서 좋다. 내를 건너다가 쉬어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핏줄처럼 흐르는 작은 폭포가 그렇게 앙증맞을 수가 없다. 저마다 호젓한 생각에 잠겨 걸을 수 있는 길을 오르다 보면 문득 골짜기가 열리고 은석사에 도착한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민가 집 같던 은석사가 새롭게 단장한 채 내 눈을 어지럽힌다. “언제쯤 이렇게 절이 새로 지어졌지요?” 하고 묻자, “지난해에 오고 안 왔는가 보지요”라고 되묻는다. 그렇게 절을 띄엄띄엄 오면 되겠느냐는 말투이다.

그곳에서 산 정상 쪽으로 조금 오르면 만나는 무덤이 바로 박문수의 묘이다. 묘지에서 병천으로 내려가는 능선 길은 한가하면서도 운치가 있다. 가끔씩 산악자전거들이 지나가기는 하지만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걷고 나면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이 바로 이 길이다.

▲ 박문수 묘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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