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진 압력 버텨내니 ‘좀비’까지 보내나”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7.0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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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한국거래소 이사장, 직원들에 ‘경영자 서신’ 보내 논란

ⓒ시사저널 유장훈

좀비, 엑소시스트, 레지던트 이블, 웨슬리 스나입스, 밀라 요보비치…. 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정환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최근 직원들에게 보낸 ‘경영자 서신’에 들어있는 말이다. 왜 그는 뜬금없이 좀비 영화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것일까.

그는 지난해 5월 거래소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지속적으로 퇴진 압력에 시달렸다. 검찰 및 금감원 조사, 공공 기관 지정 등이 있을 때마다 ‘이이사장을 압박하기 위한 정부의 노림수가 아니냐’라는 뒷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이이사장의 편지에는 최근 파행을 겪고 있는 거래소 상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고, 그 가운데 좀비 이야기도 들어 있다. 서양 귀신 영화에 자주 나오는 좀비는 죽어서도 걸어다니고 움직이는 존재이다. 거래소에는 지난 4월 두 명의 신임 본부장 인사가 있었다. 이들은 취임 초부터 낙하산 논란을 빚었다. 이이사장은 이들을 경영자 서신에서 ‘좀비’로 표현했다. 심지어 거래소에 외압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문제의 경영자 서신은 지난 5월21일과 6월3일 두 차례에 걸쳐 발송되었다. 첫 번째 서신의 내용은 이른바 ‘거래소 좀비 출현 소동’이었다. 그는 서신에서 “여의도 금융가에 최근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좀비들이 나타나서 어떤 회사를 점령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물어뜯으려 한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좀비는 영혼을 빼앗겼기 때문에 자아가 없다. 오직 교주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삼강오륜이 무너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엑소시스트와 같은 굿판을 벌이거나, 영화 <블레이드>의 웨슬리 스나입스나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 같은 전사가 필요할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새로 부임한 두 본부장을 두고 언급한 듯

▲ 훈센 캄보디아 총리(왼쪽)가 서울 여의도 KRX 홍보관을 방문해 이정환 KRX 이사장(오른쪽)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거래소측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서신은 아니었다. 어려운 때일수록 주변 상황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원칙에 충실하자는 내용이었다”라고 공식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거래소 내부 직원들의 시각은 달랐다. 이이사장이 지칭한 ‘좀비’가 새로 부임한 두 본부장이라고 보고 있다. 거래소는 지난 4월29일 임시주총에서 코스닥시장 본부장과 파생상품시장 본부장으로 각각 박 아무개 전 유가증권시장 본부장보와 전 아무개 전 시장감시본부 본부장보를 선임했다. 두 사람은 거래소 본부장보를 마지막으로 올해 초 퇴임한 인사들이다.
그러다 올 4월 임시주총을 통해 거래소에 다시 입성한 것이다. 거래소 노조는 “‘변종 낙하산 바이러스’를 거래소에 사전 주입하려는 의도이다”라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유흥렬 거래소 노조위원장은 “새로 취임한 본부장 중 한 명은 지난해 거래소의 다른 본부장에 지원했다가 낙방했고, 또 다른 한 명은 본부장보 재직 시절 평가에서 최하위 점수를 받았다. 정부가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본부장이 될 수 없는 인물들이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두 사람 모두 지난 5월 검찰 조사에서 접대비 과다 지출 혐의가 적발되었던 터라 이같은 논란이 더 커졌다. 이이사장이 ‘좀비’라는 격한 표현을 쓴 것도 이런 이유로 풀이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원래는 표현이 더 원색적이었다. 그나마 참모들이 옆에서 내용을 다듬어 이 정도로 순화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이사장이) 마음을 정리했다. 현재 적당한 시기를 저울질 중이다. 얼마 남지 않은 임기 동안만이라도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같은 경영자 서신을 썼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대통령과 친분 있는 후보가 이사장 선거에서 낙마하더니…”

실제로 이이사장이 재임한 지난 1년3개월 동안 거래소에서는 각종 이슈가 끊이지 않았다. 이이사장 취임 직후인 5월 거래소는 지난 1956년 개소 이후 처음으로 검찰 압수수색을 당했다. 접대비 과다 지출 의혹이 조사 명목이었다. 이후 거래소의 전산 장비 납품 비리 의혹으로 사건이 확대되면서 내로라하는 국내 IT업체들이 줄줄이 검찰의 압수수색을 당했다. 3개월 후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검찰로부터 처벌받은 거래소 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임직원 5명의 비위 사실을 관계 기관에 통보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한 달 후인 9월에는 감사원이 거래소를 공공 기관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지난 1월 기획재정부는 감사원 권고를 받아들여 거래소를 공공 기관으로 지정했다. OECD 국가 중에서 거래소가 공공 기관으로 지정된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더군다나 거래소는 지난 1988년 민영화된 이후 지분 100%를 민간이 보유하고 있다. 이런 거래소를 공공 기관으로 지정한 것은 결국, 이정환 이사장을 겨냥한 조치가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최근에는 금감원이 예정에도 없는 거래소 감사에 착수하자 거래소뿐 아니라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도 감사의 의도성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이 역시 이이사장을 끌어내리기 위한 표적 감사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거래소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이팔성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현 우리금융지주 회장)가 지난해 3월 거래소 이사장 선거에서 낙마했다. 이 전 대표는 당시 3명의 최종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고 예심에서 탈락했다. 이후 정부에서 거래소를 압박하는 각종 징후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 원하지 않는 인사를 찍어 내리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낙하산 논란을 빚었던 신임 본부장들이 노조와 충돌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이들이 첫 출근하는 과정에서 노조위원장과 승강이를 벌인 것이다. 두 본부장은 “폭행과 협박을 당했다”라면서 유흥렬 노조위원장을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 관계자는 “5월15일 남부지검을 통해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현재 영등포경찰서를 통해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이사장의 두 번째 서신은 이런 상황과 감사 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다. 당시 그는 해외 출장 중인 상임감사를 대신해 담당 감사실장에게 사건에 대한 공정한 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하던 감사실장이 스트레스로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이이사장은 “일의 처리 과정에서 감사 부서가 내부 및 외부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유 여하를 떠나 직원들이 맡은 업무를 수행하면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거래소 관계자에 따르면 이이사장의 이 서신 내용 또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한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감사실장은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각종 압력이 들어오면서 충격을 받아 서울의 한 병원 정신과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관계자는 “며칠간 정신병원에서 입원한 후 현재는 퇴원한 상태이다. 그것도 완쾌되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퇴원한 것이다. 이 일로 이이사장뿐 아니라 감사 역시 상당히 격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이정환 이사장도 서신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진행해야 할 감사실 업무에 내·외부의 압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필요하다면 그 실상을 공개하고 책임 소재를 가려야 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때문에 신임 본부장의 향후 거취와 함께 폭행 사건을 둘러싼 거래소 내부의 ‘헤게모니 싸움’은 더욱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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