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같은 ‘대기업 구멍가게’
  • 김지혜 (karam1117@sisapress.com)
  • 승인 2009.06.16 18:2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개설한 ‘슈퍼슈퍼마켓’, 동네 상권 장악…소상인들 폐업 속출

▲ 대형 마트의 동네 슈퍼형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매장. ⓒ시사저널 박은숙

대형 마트에는 없는 것이 없다. 심지어 길거리 포장마차의 전용 식품이었던 떡볶이와 순대까지 포장해 팔고 있다. 하지만 동네 슈퍼 주인들은 다들 같은 이야기를 한다. “대형 마트의 공습은 그래도 버틸 만했다”라고. 한때 대형 마트는 기세등등하게 과자나 우유 등의 공산품에서, 채소나 생선 같은 신선 식품, 문구류와 장난감, 심지어 중저가 의류까지 장악했지만, 동네 슈퍼들은 이른바 ‘경쟁력’ 있는 ‘틈새시장’을 개척해서 맞섰다. 접근성 좋은 곳에 가게를 잡고, 단골을 확보하고, 매일 조금씩 사게 되는 신선 식품을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온 가족을 ‘15분 배달 서비스’에 동원했다. 동네 슈퍼들은 고달프기는 해도 그렇게 10년을 대형 마트에 맞서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것조차 불가능해졌다. 3년 전, ‘대기업 구멍가게’라고 불리는 ‘슈퍼슈퍼마켓(이하 SSM)’들이 동네 구석구석을 장악하면서부터이다. SSM은 처음에는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의 대형 유통업체들이 포화 상태에 이른 대형 마트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중소형 규모의 ‘준 대형 마트’를 의미했다. 하지만 대형 유통업체들은 대형 마트로는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되자 저렴한 가격으로 개설할 수 있는 100㎡ 정도의 소규모 SSM도 개설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동네 슈퍼와 거리도 비슷하고, 파는 상품도 같고, 가격이나 배달 서비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가게 앞에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이마트 에브리데이’ ‘롯데슈퍼’ 등 깔끔하고 신뢰감 주는 ‘대기업 브랜드’ 간판을 달 수 있다. 간판 덕에 가격이 약간 비싸고 배달 서비스가 조금 느려도 고객들은 SSM을 찾았다. 그래서 동네 슈퍼들은 대형 마트보다 SSM의 공격을 더욱 치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목 좋은 동네 슈퍼를 빼앗듯 인수하기도

SSM들이 동네 상권을 무력화하는 과정은 비슷하다. 1단계에서는 직원들이 목 좋은 동네 슈퍼를 돌아다니며 통째로 ‘집어삼키기’를 시도한다. 목 좋은 곳을 발견하면 주인을 설득해 권리금을 주고 인수하는 것이다. 잘나가는 동네 슈퍼라도 위치가 지하라거나 면적이 좁아 인수할 곳이 못되면 바로 옆에 SSM을 세워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다. SSM들은 대형 유통업체를 등에 업고 동네 슈퍼보다 싸게 물건을 조달할 수 있는 것이 강점이다. 

잘나가던 동네 슈퍼들은 ‘가게를 넘기라’며 끈질기게 설득하는 대형 SSM 업체 앞에서 1차적으로 무너졌다. SSM 직원들은 슈퍼 주인들이 안 팔겠다고 버틸 경우 인근의 부동산 업자를 동원하거나, 슈퍼가 들어선 건물주에게 임대료를 두 배로 제시해서 자리를 빼앗곤 한다. 한국슈퍼마켓연합회 김경배 회장은 “내가 운영하는 매장만 해도 대형 SSM 직원들이 여러 번 다녀갔다. 목 좋은 곳에 있는 슈퍼 주인들은 공갈 협박을 받는 경우도 있다. ‘임대기간 끝나고도 장사 잘 되는지 보자’라는 식이다. 넘기지 않기가 힘들다”라고 말했다.

전북 익산에서 땅을 임대해 7년간 슈퍼를 운영했던 김철수(가명)씨도 지난해 10월 대형 SSM에게 자신의 가게를 넘겼다. 연 매출이 50억원에 이르고, 가게 면적이 2백80㎡나 되는 ‘잘나가는 동네 슈퍼’였지만 자신들에게 넘기라며 끈질기게 설득하는 SSM에 결국, 손을 들었다. 김씨는 “슈퍼가 1층에 있는데다, 단골이 많아서 그런지 롯데슈퍼, GS마트, 킴스클럽 직원이 모두 직접 찾아왔다. 7년을 키운 가게인데 할 수만 있다면 땅 주인과 재계약해 내가 운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경제 논리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나. 땅 주인에게 임대료를 SSM만큼 줄 수도 없고, 대기업과 법적 소송이라도 벌이면 골치 아플 것 같았다. 적당한 권리금에 합의하고 넘겼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차피 다 끝난 일이라며 나머지 두 개의 슈퍼나 열심히 운영하겠다고 했다. 


▲ 대형 마트의 등쌀에 못 이겨 상인들이 대거 철시해버린 청주 비하동 육거리시장. ⓒ연합뉴스

네 슈퍼들, 슈퍼슈퍼마켓보다 싸게 팔아도 ‘지는 싸움’

새로 들어서는 SSM도 문제이다. 가격이 싸고, 서비스가 뛰어난 알짜 동네 슈퍼들조차 맥없이 쓰러진다. 박승호(가명) 사장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20년간 대형 유통업체에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2년 전 분당에 1백50㎡ 규모로 슈퍼를 열어 연 15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잘나가는 동네 슈퍼’로 키워 놓았다. 인근에 이마트가 있었지만 어차피 틈새시장만 공략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욕심내지 않고 신선 식품 위주로 팔면서 꾸준히 성장했다. 온 가족을 동원해 20분 안에 배달하는 서비스도 했다.

 그러나 3개월 전, 가게 맞은편에 대기업 SSM ‘홈플러스 익스프레스’가 들어서면서 매출의 30%가 뚝 떨어졌다. 20년간 누볐던 바닥이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박사장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수차례 “우리 슈퍼가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거나 배달 서비스가 느려서 밀렸다면 덜 억울할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세 달간 팔았던 소주와 우유 이야기를 꺼냈다. “맞은편 SSM이 소주를 1천원에 판다는 말을 듣고 우리도 소주 가격을 같은 가격인 1천원으로 내렸다. 한 병당 9백80원에 사오니 겨우 20원 남는다. 손님이 카드로 결제하면 수수료 2%도 떼고, 배달까지 시키면 적자이다. 그렇게 팔아도 젊은이들은 이상하게 가격도 같고 배달도 1시간이 느린 대형 SSM에서 박스로 소주를 사갔다”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껴 더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도 마찬가지이다. “마진이 거의 없는 우유를 SSM보다 더 싼 2천100원에 팔았다. 카드 결제도 받고 20분 안에 배달도 했다. 단골을 확보한다는 기분으로 3개월간 출혈 경쟁을 감수했다”라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박씨의 판정패였다. 그는 “특히 단골이던 유모차 부대들까지 우리 가게를 지나쳐 길 건너 SSM으로 갔다. 대기업 제품이라는 선입견에서 나오는 ‘신선하고 깨끗한 이미지’는 동네 슈퍼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다”라고 하소연했다.

박사장이 적자에 허덕이는 동안 길 건너 SSM은 대량으로 소주와 우유를 싼값에 떼어와 충분히 이윤을 남기면서 팔고 있다. 그는, SSM은 시작부터 싸게 사서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구조라 애초에 동네 슈퍼와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박사장은 “SSM은 대기업의 규모를 이용해 싸게 사들이고 깨끗하고 친절한 이미지로 비싸게 팔 수 있다. 경쟁력이 없는 동네 슈퍼야 망하는 게 당연하지만 과연 지금의 경쟁이 공정한 경쟁일까”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김철수씨와 박승호씨의 사례는 SSM의 확장에 맥없이 무너지는 수많은 동네 슈퍼의 전형이다. 대형 마트의 융단 폭격에도 끄떡없던 ‘경쟁력 있는’ 동네 슈퍼가 SSM에게 무너지는 것은, 당하는 쪽에서는 멀쩡히 눈을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SSM은 대형 마트처럼 몸집이 크지도 않아 법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동네 슈퍼들에게는 SSM이 대형 마트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다. 가격 경쟁력이 뛰어나고 서비스가 좋아도, 가게 규모가 더 크고 다양한 품목을 갖추고 있어도 불합리한 경쟁 구조 속에서 동네 슈퍼들은 침몰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