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전장’ 된 예술종합학교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9.06.0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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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총장 사퇴 뒤 정체성 논란 커져 이론 교육 싸고 교수들 사이 ‘사상 논쟁’도

▲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대한 문화부의 감사와 중징계로 황지우 총장이 사퇴하면서 학생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가 시끄럽다. 예술 분야 전문인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국립 교육 기관이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란에 휩싸여 있다. 단순히 학교 운영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을 넘어서 문화계 내부의 좌우 이념 대립 양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예술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의 전당이 사상과 이념이 충돌하는 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뉴라이트 계열의 문화미래포럼과 보수 성향의 칼럼니스트 변희재 미디어발전국민연합 공동대표 등은 한예종이 실기 위주의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예종의 교수진과 학생들은 교권과 교육권 침해라며 반발하고 있다. 창작의 영역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고를 펼치고 정치적 논리에서 벗어나 있어야 할 예비 예술인들이 진보와 보수 진영의 논리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다.

‘실기 위주’ 내세우는 측 “이론 전공학과와 전임교수 불필요” 주장

한예종을 둘러싼 논란의 첫 번째 쟁점은 이론 교육을 실시하고 이론과를 만든 것이 본래 설립 취지에 맞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문화부와 문화미래포럼측은 한예종 설치령 제3조 ‘예술 영재 교육과 체계적인 영재 실기 교육을 통한 전문 예술인 양성’ 취지를 들어 한예종이 실기 위주의 교육 기관으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한예종측은 제2조 ‘예술 실기 및 예술 이론을 전문적으로 교육’한다는 규정을 들어 이에 반박하고 있다.

초기 이론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은 실기 위주의 전문 예술인이 이론을 공부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지금은 이론의 필요성보다는 이론 전공학과와 전임교수의 필요성으로 초점이 넘어갔다. 사실 창작의 영역에 이론 공부가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가 있었다. 정진수 문화미래포럼 대표는 “이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전문 예술인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이기 때문에 전임교수를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론을 전공하는 학과의 설치도 필요없다. 전임교수를 두는 것은 오히려 이론의 편식을 가져오게 된다. 강사진을 다양하게 구성하면 된다. 그 편이 비용적인 측면이나, 교육의 다양성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예종 심광현 교수는 “이론과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와서 이론과의 존립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예종 설립 취지의 기준이 되는 설치령을 보더라도 2조가 3조에 선행하는 원칙이라는 것이 명백하다”라고 말했다. 임웅균 음악원 교수는 “미국의 줄리어드나 커티스 음대 등 세계적인 음악학교들의 경우 교과 과정에서 이론의 비중이 우리보다 훨씬 높다. 좋은 예술가들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론을 강화해야 할 판이다”라며 이론 교육 확대가 예술 교육의 세계적인 추세라고 주장했다.

전면에 드러난 쟁점은 이론 교육에 관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진보적·보수적 예술계 인사 간에 지속되어온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두 세력 간의 갈등이 한예종의 미래를 둘러싸고 터져나온 것이다. 보수적 예술계 인사들은 한예종의 성장이 지난 정부에서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좌파 예술인들이 한예종의 실권을 쥐면서부터라고 설명한다. 노무현 정부에서 한예종의 이창동 교수가 문화부장관에 임명되면서 좌파 성향의 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한예종 교수로 영입되었고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한 문화계 인사는 “잠시 쉬자고 하더니 드러누워버린 격이다. 좌파 계열의 교수가 중심이 돼 이론과의 수업을 늘려가더니 이제는 이론 과목의 비중이 일반 4년제 대학보다 높은 수준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예종 교수들이 상아탑 밖에서의 일에까지 영역을 넓힌 것도 보수적 예술인들의 공분을 산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변희재씨는 일부 교수들의 전공을 문제 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빅뉴스의 기사를 통해 미학 전공자인 심광현 교수가 영화 관련 논문을 쓰기 전에 ‘영화과’ 교수로, 시인인 황지우 교수가 희곡을 쓰기 전에 연극원 서사과 교수로, 대중문화이론 전공자 이동연 교수가 전통예술원 교수로 채용된 것에 대해 지적했다.

문화부 감사에 반발하는 측 “대학 교육 자율성과 교권 침해” 우려

당사자인 심광현 교수는 “우선 ‘영화과’과 아니라 ‘영상이론과’이다. 영상이론을 가르치는데 미학을 전공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라고 반박했다. 한예종을 둘러싼 논란이 사상적 논쟁으로 변질되는 것에 대해서는 “예술가들은 정치와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다. 한예종의 1백43명의 교수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보수 인사들이 거론하는 좌파 교수들이 학교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면 다른 교수들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의 의사 결정 구조가 그렇게 우스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서 지적한 내부 갈등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5월25일 발의된 결의문이 교수 전원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을 지적하며 일축했다.

한예종은 지난 2004년 대학원을 설치해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방안을 추진한 바 있다. 당시 다른 예술 관련 대학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져 지도교수가 중요한 예술계의 특성상 한예종에 박사 과정이 신설되면 세력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예종을 둘러싼 이번 논쟁에서 전국예술대학교수연합이 나선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심광현 교수는 “황지우 총장 체제에서는 박사학위 과정 신설을 추진하지 않았다.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는 학생은 다른 학교의 박사학위 과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라며 이 문제가 한예종 학제 개편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예종을 둘러싼 논란이 촉발된 것은 문화체육관광부의 감사 결과가 나오고부터이다. 일반적인 종합 감사보다 많은 인력과 시간을 투입해 벌인 강도 높은 감사였다. 지난 5월18일 문화부는 한예종에 예술과 과학기술을 융합하는 통섭 교육 중지, 이론과의 축소 및 폐지, 서사창작과 폐지, 황지우 총장과 일부 교수들에 대한 중징계 등 12건의 주의·개선·징계 처분을 통보했다. 이에 황지우 총장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가지고 총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예산 집행이나 행정 절차에 관한 감사 지적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예술 교육 분야의 교육 프로그램을 행정 관료들이 손보려 한다는 것이 끔찍하다”라고 말했다. 문화부의 감사 결과가 대학 교육의 자율성과 교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한예종 교수들은 5월25일 1백43명 전체 교수의 이름으로 문화부에 ‘부당한 감사 결과 처분 요구 철회 요청 결의문’을 전달했다. 다음 날인 26일에는 교수, 학생, 교직원, 학부모 등이 참석한 토론회 ‘한국예술종합학교 감사 사태, 무엇이 문제인가’를 열기도 했다. 이에 앞선 22일에는 학생들이 “학생의 기본적인 학습권 침해와 부당한 감사로 빚어진 피해에 맞서겠다”라며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한편, 한예종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정진수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교수가 대표로 있는 문화미래포럼은 한예종 개혁 방안 및 설치령 개정안에 관한 심포지엄을 계획하고 있다. 당초 지난 5월27일 열 예정이었으나 6월15일로 잠정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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