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일의 ‘구명 로비’ 청와대까지 뻗었다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9.05.1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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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박연차 세무조사 관련해 청와대 전·현직 고위 인사 만나 청와대 ‘경고’로 제동 걸려…한상률 국세청장 접촉 가능성도

▲ 천신일 회장이 5월5일 서울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개교 104주년 기념식 및 고대인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왼쪽). 지난 5월7일 검찰 관계자들이 세중나모여행에서 압수한 서류들을 차에 싣고 있다(위).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담장 위에 섰다. 검찰은 이미 천신일-박연차 커넥션과 관련해 상당한 혐의를 확보하고 천회장의 알선수재 혐의에 주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5월8일 “국세청과 세중나모여행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수사팀이 예상했던 것보다 내용 있는 것들을 꽤 확보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세청 관계자들이 파일을 지우는 등 압수수색에 대비한 흔적이 있으나 쉽게 복구할 수 있는 등 의외로 보안에 취약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천회장과 관련 있는 다수 자료들을 검찰이 확보함에 따라 천회장과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의 관계, 천회장이 실제로 세무조사를 무마하기 위해 로비를 했는지 등이 집중 수사 대상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천회장은 지금까지 “세무조사와 관련해 박회장으로부터 단돈 1원도 받지 않았다”라고 강조해왔다.

박연차, 천신일·김정복·추부길 등 세 갈래 통로로 움직인 듯

<시사저널>은 취재 과정에서 천회장이 지난해 박회장에 대한 세무조사가 진행될 때 여권 핵심부를 상대로 그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 사실을 확인했다. 국세청이 느닷없이 박회장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은 지난해 7월30일이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여권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8월 초쯤 천회장이 박회장에 대한 세무조사와 관련해 전·현직 청와대 고위 인사를 접촉했다”라고 말했다. 천회장은 이들 가운데 한 명과는 학연으로 연결되어 있고 다른 한 명은 인수위원회 시절에 알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전·현직 청와대 고위 인사는 박회장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이다.

청와대 현직 고위 인사는 이와 관련한 <시사저널>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사정 기관의 한 관계자는 “당시 여권 핵심부에서 천회장이 박회장을 위해 움직인다는 얘기는 뉴스도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천회장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천회장 등이 박회장에 대한 세무조사에 대해 대책을 세우는 회의를 했다는 ‘대책회의 의혹’에 이어 천회장이 당시 여권 핵심부를 상대로 움직인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은 더욱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이미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이 박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고 여당 의원들을 상대로 움직인 사실이 밝혀진 상태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 박회장은 천회장과 사돈 관계인 김정복 전 중부지방국세청장,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 등 최소한 세 갈래 통로를 통해 청와대와 국세청 등을 상대로 로비에 나선 것으로 관측된다. 청와대에 대한 박회장의 로비는 민정수석실에 집중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당시 천회장은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도 직접 접촉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세무조사와 관련한 결정권을 한 전 청장이 쥐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네 달 동안 최고위 과정에서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전·현직 청와대 고위 인사들을 상대로 한 천회장의 ‘박연차 구명’ 움직임은 당시 청와대에 즉각 포착되었다. 청와대 관련 부서에는 ‘천신일 경계령’이 내려졌고, 천회장에게는 “(박연차 회장을 위해)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라는 ‘경고’가 주어졌다. 지난해 8월에서 10월 사이에 진행된 일이다. 청와대로서는 발 빠르게 움직여 천회장의 발을 묶은 셈이다. 사정 기관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의 ‘경고’를 받은 이후 천회장이 박회장과 관련해 움직인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천회장 또한 추부길 전 비서관과 마찬가지로 로비와 관련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박회장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직접 보고한 때는 지난해 11월12일로 알려져 있다. 이때를 전후해 천회장과 이명박 대통령과의 ‘의미 있는’ 접촉은 차단되었다. 지난 3월 하순 천회장이 ROTC 모임과 관련해 청와대에서 이대통령을 만난 적은 있다. 하지만 수십 명이 함께한 행사 성격의 단순 모임이었을 뿐, 대통령과 별도로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 통화를 하는 등의 접촉은 지난해 말 이후 끊어졌다는 것이 사정을 아는 여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박연차 수사와 관련해 검찰이 통제되지 않고 있다”

지난 5월7일 밤 만난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박연차 수사와 관련해 검찰이 통제되지 않고 있다. 여권에 컨트롤타워가 없다. 수사팀은 지난 대선 자금 수사 때의 송광수-안대희와 같은 ‘드림팀’을 꿈꾸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수사 흐름을 조절할 수가 없는 상태이고 천회장의 운명은 오롯이 검찰의 손에 달려 있다는 얘기였다. 이 인사는 “천회장 외에도 여권 인사들이 더 다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천회장에 대한 처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처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이 검찰 안팎의 관측이다. 천회장과 관련해서는 박회장으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로비와 관련해 돈을 받았다는 의혹, 박회장으로부터 수억 원을 받았다는 전표를 검찰이 확보했다는 의혹, 수백억 원의 주식을 현금화했다는 의혹 등이 보도되었으나 딱부러지게 검찰이 ‘범죄 혐의’를 확인해준 바는 없다. 천회장도 제기된 의혹들을 부인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 드러난 것으로 본다면 노 전 대통령과 비교할 때 천회장의 혐의가 더 무겁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검찰은 여론의 추이와 ‘형평성’ 등을 고려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천회장에 대한 처리 시기와 혐의의 경중 등을 조절할 것으로 예상된다.

‘천신일 수사’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다. 천신일 ‘국세청 로비 의혹’을 밝히기 위해서도 한 전 청장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 전 청장은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내용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전격적으로 박회장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이나 계선을 무시하고 자신이 직접 세무조사팀을 지휘한 것, 정동기 민정수석을 제치고 대통령에게 직보한 것, 검찰에 일부 자료를 빼고 넘긴 것, ‘그림 로비’ ‘경주 골프’ 사건이 흐지부지된 것, ‘박연차 게이트’가 불거지기 직전의 갑작스런 출국 등 하나하나가 정치적인 맥락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검찰은 “연결이 되고 있다”라며 한 전 청장도 조사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한 전 청장도 “협조하겠다”라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공부를 하다가 3~5년 뒤에 귀국하겠다”라는 한 전 청장이 전화 조사 등이 아니라 귀국해 검찰 조사에 응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한 전 청장에 대한 수사는 여권 핵심부에 또 다른 파문을 부를 수 있다. 지난 1월  ‘그림 로비 의혹’과 ‘경주 골프’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한 전 청장은 여권 핵심부의 사퇴 권유에도 한동안 ‘저항’하며 버텼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그가 구속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선선히 귀국할까. 여권 핵심부도 ‘또 다른 폭탄’이 될 수 있는 그의 귀국을 반기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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