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일치인가,‘기획 출국’인가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9.04.0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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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률 전 국세청장, ‘리스트 인물’들 체포 직전 돌연 미국행 청와대측과 출국 문제 조율했을 가능성 제기돼

ⓒ연합뉴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다시 뉴스메이커로 부상했다. 지난 1월 청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두 달여 만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의 측근과 이명박 대통령의 동서 등과 골프 회동을 하면서 구설에 올랐다. 여기에 그가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인사 청탁과 함께 고가의 그림을 상납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이같은 악재가 겹치면서 그는 ‘불명예스럽게’ 국세청을 떠나야 했다.

이후 칩거하던 한 전 청장은 지난 3월15일 돌연 미국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출국 시점은 공교롭게도 검찰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정·관계 로비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하던 시점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진짜 출국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 전 청장의 주장대로 그가 순수하게 공부를 하기 위해 출국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 박연차 게이트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보는 관측이 우세하다.

국세청은 지난해 7월 박연차 회장 소유인 태광실업과 정산개발에 대한 특별세무조사에 착수했다. 박회장이 2백억원대의 세금을 포탈한 사실을 적발한 국세청은 같은 해 11월 박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칼자루를 넘겨받은 검찰은 12월12일 박회장을 구속했다.

박회장이 구속될 당시 국세청과 검찰 안팎에서는 박회장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한 명단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명이 적힌 정체불명의 리스트가 나돌기도 했다. 당시 리스트에 올랐던 인사들 가운데 일부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박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세무조사 결과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

한 전 청장은 지난해 박회장 소유 회사들에 대한 세무조사 과정과 결과를 소상히 알 수 있는 위치였다. 이에 ‘박연차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들여다보았을 개연성이 크다. 한 전 청장 재직 시절 국세청 안팎에서는 “한청장이 지나칠 정도로 정권의 눈치를 본다”라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한 전 청장은 세무조사 결과를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한 전 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세무조사 결과를 보고하면서, 이대통령과 절친한 아무개 인사가 박회장으로부터 수십억 원을 받은 것 같다는 내용을 보고했던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올 3월로 접어들면서 검찰은 박연차 리스트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한 전 청장이 출국(3월15일)한 이틀 뒤인 3월17일 이정욱 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이 박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긴급 체포되면서 박연차 리스트의 뚜껑이 열리기 시작했다.

특히 한 전 청장이 출국한 지 1주일만인 지난 3월21일에는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검찰에 체포되었다. 박회장에게서 지난해 9월 세무조사 무마 명목으로 2억원을 받은 혐의였다. 잇따라 현 정부의 첫 민정수석을 지낸 이종찬 변호사와 이대통령의 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이 지난해 박회장 세무조사에 대한 대책회의를 가졌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지난해 11월 국세청이 탈세 혐의로 박회장을 고발하면서, 검찰 안팎에서는 박회장과 이변호사·천회장 등이 절친한 관계라는 수군거림이 나돌았다.

여권 인사들인 추 전 비서관을 비롯해 이변호사·천회장 등이 박회장의 세무조사를 무마하려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세인들의 시선은 국세청으로 쏠렸다. ‘박연차의 사람들’이 ‘누구’를 통해 박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를 무마시키려 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 전 청장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하지만 그는 현재 국내에 없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시점에 출국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 전 청장의 출국을 청와대가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국세청의 또 다른 관계자는 “한 전 청장이 청와대 쪽에 자신의 출국 의사를 밝힌 다음 조용히 떠났던 것 같다”라고 귀띔했다.
검찰은 한 전 청장의 출국 시점과 박회장 로비 혐의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 시점이 맞아떨어진 것에 대해 “공교로운 것 같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 전 청장과 추 전 비서관이 만난 정황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국세청 내부 동향에 정통한 한 인사는 “한 전 청장과 추 전 비서관은 직접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국세청 고위 간부 출신인 ㅊ씨가 끼여 있다. 추 전 비서관과 ㅊ씨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그리고 ㅊ씨가 국세청 재직 시절, 한 전 청장은 그의 직계 부하 직원이었다. 이에 추 전 비서관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ㅊ씨를 통해 한 전 청장에게 세무조사를 무마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 인사의 설명에 따르면, 국세청 전직 고위 간부 출신인 ㅊ씨가 추 전 비서관과 한 전 청장 사이에서 중개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검찰의 설명대로 추 전 비서관과 한 전 청장은 직접 만나지 않았을 수 있다. 추 전 비서관과 한 전 청장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한 ㅊ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상납 의혹도 수사 않고 덮어

이에 ㅊ씨의 입장을 듣고자 지난 3월25일과 26일 여러 차례 그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ㅊ씨측에서는 “(ㅊ씨는) 오래전에 지방에 내려갔다. 휴대전화도 안 갖고 다니기 때문에 연락할 방법이 없고, 연락도 오지 않는다”라고만 밝혔다.   

이와 별도로 한 전 청장에게 걸려 있는 문제는 또 하나 있다. 바로 인사 청탁과 함께 전군표 전 청장에게 그림을 상납했다는 의혹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림 상납 의혹이 지난 1월 중순 처음 불거졌을 때만 해도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선(先) 진상규명이며 그 후 대책이 있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진상규명 작업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당시 청와대와 국세청 안팎에서는 한 전 청장이 전군표 전 청장뿐 아니라 여권의 핵심 실세들에게도 그림을 상납했다는 루머가 나돌았다. 그러면서 청와대가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검찰 역시 그림 상납 의혹에 대해 수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론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 전 청장은 국세청을 떠났고, 출국한 상태이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그의 이름은 한동안 매스컴에서 떠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전 청장을 잘 아는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내년까지는 귀국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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