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다”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9.02.24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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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근대사에서 어머니상이 사회적으로 강요된 증거들 들춰

     
국어사전에 모성애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본능적인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식들은 맹목적이며 한결같은 본능으로 어머니가 자신들을 사랑해왔을 것으로 믿는다. 과학에서도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을 설명하면서 ‘명백한 본능’임에 토를 달지 못하게 한다. 이는 모성애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어머니나 각자의 사정으로 어머니에게 효행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식들이 사회에서 비정상인 취급을 당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여성들의 출산율이 현격히 떨어진 현상만 해도 그렇다. 일각에서는 국가적인 위기 운운하면서 결혼하지 않는 여성 혹은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을 ‘본능을 거스르는 사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여성에게 물었다. “모성은 본능일까, 아니면 여성들이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일까?” 대답하기까지 머뭇거리는 여성이 많다. 머릿속이 일순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라는 자리가 본능으로 만들어진 자리라면 잔꾀를 부린다거나, 몇몇 권한을 다른 이에게 양도한다거나, 하루 중 어떤 때에는 어머니 노릇을 하다가 그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누린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 모성이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이라면, 개인적인 선택으로 모성을 저버린다고 해도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자아까지 지탄받지는 않을 것이다. 또, 본능이라면 모든 것을 바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처럼 어머니라는 온화한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는 여성도 많을 것이다. 

모성 또한 이데올로기처럼 사회에 자리 잡게 된 것이라면 모성의 조건에 관한 이야기들은 결정적이고 권위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권위에 저항할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모성은 수많은 여성들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불안에 떨게 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압력 때문에 여성들은 진심으로 어머니가 되어야겠다는 욕구가 없는데도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할 수도 있겠다.

“모성애는 근대가 발명한 역사적 산물”

<만들어진 모성>은 현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재평가하는 데 주력해온 프랑스 여성 철학자가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해 모성애의 본질에 관해 파헤친 역작’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17~20세기 프랑스 사료들을 분석해,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근대가 발명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사랑, 특히 모성애는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우러진 복합적 게임 속에서 후천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모성애라는 개념은 18세기 말에 들어서야 의미를 가지게 된 매우 ‘근대적’인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저자는 모성애가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가장 핵심적인 예로 18세기 프랑스에서 관행처럼 행해졌던 유모 위탁 문제를 제시했다. 당시 어머니들은 아이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유모에게 보냈는데, 이 행위는 언뜻 보면 아이들의 환경을 위해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으로 보낸 것 같지만, 사실 이런 유모 위탁 행위는 유아를 방기한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보내진 아이들은 유모의 무관심과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대부분 죽어갔고, 심지어 이미 유모의 집에서 두세 명의 자식을 잃었던 어머니들이 같은 유모의 집에 자식들을 또 보냈다. 1년 남짓 동안 영아 31명을 죽게 한 유모도 있었다. 이런 증거들이 모성애가 원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머니가 아이를 맡긴 뒤 멀리 떨어진 아이에게 수년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저자는 과연 모성애가 존재했는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의문에서 출발해 저자는 각종 통계를 뒤지고 역사적 사건을 시대적 상황과 함께 분석하면서 사회적 필요에 따라 ‘어머니상’을 만든 예들을 찾아내고 ‘모성 본능’이라는 말조차 만들어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모성애란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성애라는 감정은 본질적으로 우발적일 수밖에 없다.”

당연시해온 ‘완전한 어머니상’을 깨부수는 주장이 아닌가.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여성성의 자유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와 자식 간에 이간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성애라는 말로 여성을 억압하거나 강요하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여자가 무슨…’이라거나 ‘애 엄마가 왜 그래’라는 등 남자는 용서되고 여자는 용서되지 않는 불평등에 대한 변호인 셈이다.   

저자는 17~18세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모성애가 19~20세기에 갑자기 극대화되어 나타났고, 1960년대 이후 모성 감정이 다시 쇠퇴하면서 부성애라는 새로운 사랑이 등장했다고 결론짓는다. 모성애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며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그렇게 자기 자식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에 더는 차이가 없으며,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에 나오는 ‘양성일체’의 생명체와 같이 미래에 남성과 여성이 합심해서 새로운 낙원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띄웠다.

희망을 느끼며 책을 덮으니,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자식에 대한 사랑을 베푸신 ‘어머니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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