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은 정권의 ‘봉’인가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09.01.20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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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 자리, 정부의 인사 개입에 번번이 노출…장기적 운용 방향 기대하지 못해

ⓒ시사저널 임영무

포스코 이구택 회장이 전격 사임하면서 민영화된 공기업의 위상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포스코는 정부 지분은 전혀 없이 외국인 지분율이 40%가 넘어 사기업을 넘어 국제 기업화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번 조치에 대해 과거에 공기업이었던 기업의 수장 자리가 대통령의 논공행상을 위한 전리품이 된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근 각계의 반발을 사고 있는 가운데 추진되고 있는 증권선물거래소의 공기업 지정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이사장 자리에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이팔성 현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제치고 이정환 이사장이 선임되자 이에 대한 보복성 조치라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나오고 있다. 실제 금감원과 감사원, 검찰까지 동원된 전방위적인 감사에서도 거래소의 일부 경비 지출 과다 이외에 이사장 개인의 비리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도덕적인 청결성을 무기로 거래소는 공기업으로 지정될 경우 헌법소원 청구 등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하겠다며 정부에 정면 대응할 뜻을 밝히고  있다.

대통령 만들기에 이런저런 연줄로 관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일정 수준의 배려는 어느 국가에서나 용인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의 모든 분야 인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이제는 민영화된 과거의 공기업들이다. 이런 회사들은 이미 새로운 주주들로 주인이 바뀌었고, 과거 정부의 관리 하에 있었다는 인식만 남아 있을 뿐 실제 정부의 지분이나 권리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챙겨주어야 할 사람들을 위해 있지도 않은 지분권을 행사해서 억지로 자리를 짜내는 것은 해당 기업의 미래나 국가 경제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체적 수급 문제 해결하려면 의사 결정의 독립 확보해야

이런 폐해가 더욱 심각하게 우려되는 분야가 연기금이다.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등 주요 연기금은 그동안  지배구조와 관련한 문제가 수차례 제기되었으나 전혀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주지하는 것처럼 이들 연금의 미래는 현 시점에서는 암울한 실정이다. 결국, 시기의 문제일 뿐 이들 연금의 고갈은 예정되어 있는 상황이고, 최종적으로는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탱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연금의 고갈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이들 연금이 자체적으로 수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치의 출발은 연기금 의사 결정의 독립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들 연금의 수장들마저 정부의 인사 개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한가운데에 국내 최대의 연금으로 성장한 국민연금이 있다.

국민연금을 관리하는 기금운용본부는 보건복지가족부 산하에 있다. 복지부가 연금에 대한 수급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금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영향력이 막강해지자 자금 운용이나 재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 집단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기획재정부(과거 재정경제부)가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복지 부문의 전문가가 기금 운용 부문을 맡고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얼마 전 기획재정부 과장급 실무진이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원을 불러 ‘조직 혁신 방안이 필요한 것 아니냐’라는 요구를 한 사건으로 복지부와 기획재정부 간에 설전이 벌어진 것도 결국, 이런 지배권에 대한 문제가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기획재정부의 기본 입장은 국민연금이 증시에서 큰손으로 일정 부분 역할을 해주는 것이 국내 경제 전체 밸런스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는 국민의 노후를 책임질 복지 예산 성격을 갖는 국민연금이 정부의 경제 논리에 따라 증시 부양이나 부적절한 용도로 사용될 것을 우려해 기금운용본부를 국무총리실 산하에 두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공사 설립을 통해 독립된 기관으로 분리를 추진하고 있다. 즉, 기획재정부는 국민연금을 직할 부대로 끌어들이고 싶어하고, 보건복지가족부는 차라리 공사로 만들어 독립기관화시키자는 입장을 고수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국회에 관련 법안이 제출되어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직 통과가 되지 않고 있다.

공무원연금은 이미 기금이 모자라 2009년에 2조5천억원에 달하는 정부 보전을 요청한 상태이다. 이 금액도 매년 눈덩이처럼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퇴직한 공무원들의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국민이 매년 수조 원의 부담을 져야 하는 것이다. 사립학교 교직원이 가입 대상인 사학연금에도 국가에서 5천억원에 가까운 지원을 해주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지원을 받는 연금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연금이 국민의 혈세를 투입해서 유지되고 있는 만큼 그 수장 자리는 논공행상의 전리품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의 공사화는 기금 운용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하다. 국민연금이 국민의 최후 안전판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기금 운용이 오로지 복지 증진을 위한 논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낙하산 논란·정권 임기와 맞물려 단기적 성과에만 치중할 수밖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얼마 전 신임 박해춘 이사장이 취임한 이후 처음 실장급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여러 실장들의 승진과 자리 이동이 있는 와중에 초기부터 기금운용본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 명의 실장 이름이 사라져버렸다. 기금운용본부의 다른 직원들과 달리 계약직이 아닌 일반직이어서 해고는 면했지만 자리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인사의 말에 따르면 ‘이사장을 대신해서 정부의 입장과 다른 의견을 냈다가 괘씸죄에 걸려서 책상이 치워진 것’이라고 한다. 어느 조직이나 인사 과정에서 업무 능력에 따른 자리 이동은 있을 수 있지만, 기금 운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사람이 정치적인 이유로 하루아침에 업무에서 제외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기금 운용과 인사의 독립성이 왜 확보되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박해춘 국민연금 관리공단 이사장이 8월27일 청와대 강윤구 사회정책 수석비서관을 면담한 뒤 9월 한 달 동안 1조9천6백54억원의 순매수를 기록했다. 이 금액은 2008년 1∼8월 매수액(1조4천6백67억원)보다 더 많다”라며 정치적인 압력에 의해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가 늘어났음을 시사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의 노후를 책임져야 할 국민연금이 항상 그런 의혹을 받아야 하는 것도 문제이다. 어느 누구도 연금의 운용이 독립적이라고 믿지 않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박해춘 이사장은 최근 “공무원연금은 9월부터 크게 적자가 나서 현재 4조원이 디폴트 상태이다. 정부에서는 공무원연금 보고 국민연금에 좀 배우라고 한다. 2008년 국민연금 기금 운용 수익률은 마이너스가 아닌 미세한 정도의 플러스 수익률이 될 것으로 본다. 경제 위기를 맞아 세계 주요 연기금이 8~20%의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나름으로 선방했다”라고 자화자찬했다고 한다. 수십 년간을 운용해야 하는 연금의 입장에서 1년의 성과를 가지고 성패를 논하는 것은 전문가의 자세가 아니다. 물론 세계적인 증시 침체와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원금을 까먹지 않았다는 것은 나름으로 의미있게 평가할 만하지만 역설적으로 추가적인 수익 기회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낙하산 논란이 끊이지 않는 연금의 수장 자리가 결국, 정권 임기와 맞물리면서 연금의 장기적인 운용 방향이나 성과보다는 단기적인 성과 올리기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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