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영화의 힘도 가끔은 세다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8.12.1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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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6만5천 관객 동원하며 <원스> 기록 넘보는 중…입소문 타고 지방에서도 ‘러브콜’

▲ 작은 영화 기대주들이 다양성 영화관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아래는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점. ⓒ시사저널 우태윤

우리에게 생소한 북유럽의 영화 한 편이 극장가에 조용하지만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뱀파이어 소녀와 왕따 소년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스웨덴 영화 <렛미인>이 작은 영화임에도 흥행에서 선전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개봉 첫 주 1만7천3백52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9위로 데뷔한 <렛미인>은 개봉 5주에 접어든 지금까지 꾸준한 흥행세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11월 13일 개봉한 이후 12월 10일까지 영화사 추산 7만5천명의 누적관객을 동원했다. 개봉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13개관에서 상영을 시작했지만 그 주 주말부터 33개관으로 확대 개봉했다. 영화를 보고자 하는 지방 관객의 요구로 지방 극장주들이 영화 상영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번 주부터는 극장 체인 CGV 등이 빠지면서  13개 개봉관으로 줄었지만 영화를 찾는 관객층은 더 다양해지고 있다. 작품성을 앞세운 유럽예술영화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영화수입사인 데이지엔터테인먼트의 안경희씨는 “개봉 이후 꾸준한 흥행추이를 기록하고 있다. 객석 점유율도 높은 편이다. 지금의 흥행 추세는 13주 동안 2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원스>보다도 빠른 것이다. 현 추세를 이어간다면 <원스>에 버금가는 흥행기록을 세울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재미없는 유럽 영화에 관객 몰려 ‘이변’

<렛미인>은 유럽과 미국에서 인기를 얻은 욘 린퀴비스트의 원작 소설 <Let the Right One In>을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뱀파이어 장르의 달인인 원작자와 장르에 문외한이지만 왕따 소년기를 거친 감독의 경험이 시너지를 발휘했다.

작은 영화의 흥행이 <렛미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반 상영작의 1천만 관객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둔 <원스> 이후 성공적인 작은 영화들이 꾸준히 등장했다. 올해만 해도 이누도 잇신 감독의 <구구는 고양이다>, 봉준호, 미셀 공드리, 레오 카락스의 합작품 <도쿄>, 일본 애니메이션 <피아노의 숲> 등이 3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원스> 이후 이어지고 있는 음악 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응도 여전하다. 평균나이 81세의 노인밴드 ‘영 앳 하트’를 주인공으로 한 <로큰롤인생>은 중장년층 관객들의 호응을 얻으며 개봉 첫 주 4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해 장기상영 채비를 갖추었다. 또 다른 음악영화인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클럽> 역시 적은 개봉관이지만 관객이 꾸준히 들고 있다. 이밖에도 올해 칸영화제에서 이슈의 중심에 섰던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바시르와 왈츠를>, <풀몬티>의 피터 카타네오 감독이 만든 <오펄드림> 등이 기대를 받고 있다.

개봉 4주 만에 7만 관객을 훌쩍 넘긴 <렛미인>의 흥행 몰이는 이례적이다. <원스>는 아름다운 음악과 사랑이야기로 연인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지만 <렛미인>은 스웨덴이라는 낯선 영화적 배경에 우리 관객들이 선호하지 않는 뱀파이어 호러라는 장르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평론가 김종철 씨는 “부천영화제와 시사회를 통해 먼저 본 사람들의 평가가 워낙 좋다보니까 어떤 영화인지 호기심을 일으킨 것 같다. 마니아 장르였던 뱀파이어 영화가 대중화됐고, 자극적인 것이 적고 드라마가 강한 것도 장점이다.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어렵지 않다는 것도 관객의 호응을 얻은 이유이다”라고 설명했다.

<렛미인>의 흥행 요인은 먼저 완성도 있는 영화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렛미인>의 완성도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평단의 반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웨덴 예테보리 영화제, 트라이베카 국제영화제, 판타시아영화제 등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지난 7월에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최우수감독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다. 국내 영화 잡지 씨네21의 20자평에서도 7명의 평론가 모두에게 별점 4개 이상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평단의 반응이 흥행으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흥행은 결국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이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에 달려있다. 대규모 개봉이 불가능한 작은 영화는 관객의 입소문이 흥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 성공 이후 작은 영화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왼쪽부터 .

대작에 눌리다 불황에 빛을 보다

<렛미인>에 대한 입소문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뜨겁게 번져가고 있다. 영화를 본 네티즌 대부분이 낯설지만 아름다운 화면과 감성적이면서도 가볍지 않은 이야기에 호감을 드러내 보인다. 특이한 점은 영화에 대한 평가가 좋고 나쁘고를 넘어서 영화에서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내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남성생식기를 거세한 양성구유자로 묘사된 이엘리의 성정체성부터 시작해서, 이엘리에게 피를 공급해온 호칸의 정체, 순환적인 이야기 구조, 열린 결말 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쏟아지고 있다. 독특한 캐릭터와 설명적이지 않은 내러티브 전개, 인간과 뱀파이어의 단절을 의미하듯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의 이미지 등 화면을 가득 채운 미장센의 구성요소들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지금 영화계는 깊은 불황에 빠져 있다. 유명스타를 기용하고 큰 돈을 들여 컴퓨터 그래픽으로 도배를 해도 관객들이 꿈쩍하지 않고 있다. 반면 작은 예산으로 제작하고, 마케팅 비용도 적게 쓴 몇몇 영화들은 멀티플렉스에서 대규모 개봉을 하지 않더라도 장기 흥행에 나서고 있다. 이런 작은 영화들은 지난 몇 년간의 흥행 호시절에는 대작 오락 영화에 눌려 세상과 만나지도 못했다. 멀티플렉스 호시절의 서자가 불황에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힘으로만 승부하는 이런 작은 영화들이 멀티플렉스의 물량주의 독과점을 깨고 있다. 하지만 어려움도 있다. 스폰지하우스의 윤범석 과장은 “전체적으로 예년에 비해 30~40% 정도 빠졌다. 불황일수록 문화비 지출이 준다. 관객들도 어려운 영화를 안 보려고 한다. 구성이 애매한 영화들은 다양성영화관에서도 선뜻 개봉하기 힘들다”라고 어려운 현실을 토로했다.

<원스>에 이은 <렛미인>의 흥행은 관객에게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한국영화가 주춤하는 사이 외화수입에 대한 비중이 늘었고 작품성 있는 작은 외화들도 많이 들어왔는데 이 영화들의 성공이 더 많은 좋은 작품들의 수입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영화의 성공은 관객의 영화보는 패턴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김종철 평론가는 “멀티플렉스 시대에 작은 영화의 장기상영은 예전에 단관극장에 가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근처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단기간에 치고 빠지는 영화를 소비하는데 익숙했던 관객들이 시간을 가지고 멀리까지 찾아가서 영화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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