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비엔날레가 버겁다
  • 이재언 (미술 평론가) ()
  • 승인 2008.11.18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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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개최하는 광주·부산, 뿌듯하면서 착잡…시민과의 소통에 충실해야 미래 밝아

▲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된 알로라·길레르모·칼자디라의 .

지난해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신정아 사건 덕분일까, ‘비엔날레’ (biennale)가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미술과 관련된다는 정도는 우리 일반 국민이면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게다가 여러 도시들이 경쟁적으로 개최한 여러 종류의 비엔날레 난립도 우리 국민의 상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전국적으로 비엔날레라는 이름의 격년제 미술 행사를 하는 도시들이 많지만, 이름만 그럴듯할 뿐 실제로는 외국 작가 몇 명 포함시켜놓고 비엔날레라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나마 최근 들어 많이 정리된 느낌이다.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많은 행사를 개최해왔지만 신통치 않은 결과들에 실망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비엔날레이든 트리엔날레이든 거대한 세계 미술 축제의 개최 자체가 그리 간단치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국민적 관심을 받고 열리는 비엔날레는 두 개이다. 광주와 부산. 미술 올림픽과도 같은 비엔날레가 두 개씩이나 열린다는 사실이 뿌듯하면서도 착잡하다.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왜 하필이면 양쪽이 동시에 개최를 하는지 말이다. 비엔날레와 같은 거대 규모의 국제 미술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장소와 시설, 조직, 재정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바로 이러한 기본적 조건들에 시민들의 공감대와 예술적 전통과도 같은 환경적 조건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은 비엔날레가 가장 중요한 행사로 정착된 광주시의 경우도 처음 비엔날레를 개최했을 때, 낯선 현대미술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시민들의 저항이 적지 않았다. 이른바 ‘예향’이라 자부하는 도시에서조차 그러했다.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광주비엔날레가 지난 11월9일, 부산비엔날레가 11월15일 각각 끝났다. 1주일 사이로 찾아간 두 비엔날레는 각각의 장점을 가진 가운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각각은 과제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광주비엔날레를 살펴보자.

자타가 공인하는 예향의 전통 위에 새로운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지역 사회의 비전과 열망이 반영되어 시작된 것이 바로 광주비엔날레이다. 1995년에 시작해 2000년부터 짝수 해로 정착함으로써 이번으로 7회에 이르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비엔날레는 자칫 상충하기 쉬운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지향하고 있다. 하나는 예술의 동시대 미학적 현안과 담론을 조형적으로 구현하는 국제적 조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대중과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과제이다. 두 가지 목표는 사실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2008년 광주비엔날레는 신정아씨가 낙마한 가운데 오쿠이 엔위저 총감독의 지휘와‘연례보고AnnualReport’라는 타이틀 아래 지구촌 미술 문화에 대한 리뷰와 리포트라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내용적으로 의미가 있는 전시를 구성했다. 비엔날레관, 광주시립미술관, 의재미술관, 광주극장, 대인시장 등의 공간을 활용해 이루어진 전시의 구성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1)길 위에서 On the Road : 최근 1년 동안의 주요 전시에 의한 전시, 2)제안 Position Papers : 젊은 기획자 5인의 제안 형식 전시 및 프로젝트, 3)끼워넣기 Insertions : 독자성과 이슈가 뚜렷한 개별 작가 전시 및 프로그램 등이다. ‘우발적 공동체’ ‘상대적 조국’ ‘돌아갈 곳 없는 자들의 향락에 관하여’ ‘복덕방’ 등의 기획 아이템들은 첨예한 이슈들과 담론들 속에서 직면한 본질의 문제를 환기해가면서 소통을 접합시키고자 노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 부산 비엔날레에 출품된 카민 르차이프라셋의 .

하지만 ‘복덕방’을 제외하고는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와 기획이 설정되어 있음에도 실제 작품들의 디스플레이에서는 그러한 기획의 의도가 효율적으로 전달되지는 못한 느낌이다. 복덕방의 경우야 지역의 역사와 정서에 침투해 들어가 지역민들과 교감하는 공공적 전략과 구성 덕에 전달과 소통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 전시들의 경우 관람자들은 복잡한 해설과 안내를 받아야만 간신히 기획자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 산만함이 적지 않은 걸림돌이었다. 관람자들에게 서비스한 해설이라는 것도 이해와 교감의 혼란을 막기는 어려웠다. 아니, 혼란을 가중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광주비엔날레’ 자체의 정체성과 방향을 보다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가능성 보여준 부산 비엔날레

이런 점에서라면 부산비엔날레가 좀더 명료한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으며, 또한 방향 설정 면에서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낭비’(expenditure)라는 주제 자체가 문화와 예술이 오늘의 사회에서 소모와 방종으로 기울고 있는 암울한 정체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모색의 의미로 보인다. 회화, 사진, 영상, 설치, 야외 조각 등 세계에서 초대된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독특한 낭비의 철학과 현대미술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비교적 잘 전달되고 있는 느낌이다. ‘현대미술전’ ‘바다미술제’ ‘부산 조각 프로젝트’로 구성된 전시들의 내용을 보면, 첨예한 미학적 담론이나 국제적인 동향보다는 관람자에게 선사할 흥미로운 볼거리와 시각적 영양가에 더 역점을 둔 느낌이다.

▲ 부산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첸 원링의 .

이런 점은 의미 있는 성취이면서도 한계이기도 하다. 부산은 광주와 비교했을 때 우선 미술 인프라 자체가 취약한 편이다. 전시관도 시립미술관 외에는 이렇다 할 시설과 공간을 잘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나마 APEC 나루공원을 활용한 조각 프로젝트가 관람자 및 일반 시민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공간으로 보인다. 물론 공공 미술 자체가 오늘날 중요한 화두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역시 공공 미술의 논의를 심층적으로 개진시키는 차원이기보다는 안전하고 무난한 절충과 타협의 의도만 두드러져 보인다. 그럼에도 부산 비엔날레가 보여준 가능성이라면 바로 이 대목이다. 많은 시설을 확충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현재의 여건을 최대한 활용해 현대미술 자체를 시민들의 생활과 정서 가까이 진입시켜 함께 호흡하고 교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끊임없이 개발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소통에 충실한 것이 낮은 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통에 충실하면서도 좀더 높은 수준의 미술 축제를 만들어나가는 것만이 우리 비엔날레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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