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판 환란 ‘폭풍’ 더 졸라맬 허리띠가 없다
  • 안준용 (뉴욕중앙일보 기자) ()
  • 승인 2008.10.2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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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값 급등에 한인 사회 ‘암흑기’…유학생·관광객도 지갑 닫아

▲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도시락을 찾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맨해튼 32스트리트 한인 타운에 위치한 한국계 슈퍼마켓에서 직원이 점심 시간에 팔 도시락을 정리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달러를 풀어 은행들의 유동성 해결에 나섰고, 유럽연합(EU) 국가들이 대대적인 공조에 합의했지만 ‘뉴욕발’ 금융 위기의 양상은 여전히 심상치 않다. 그 진앙지에 위치한 뉴욕 한인 사회 역시 ‘경기 침체’의 늪에서 신음하고 있다. 한인 이민자들의 주력 업종인 네일·청과·세탁업계를 포함해 거의 모든 업종이 사상 유례가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과 유학생을 상대로 한 업소들도 급격한 매출 감소로 고통받고 있다. ‘뉴욕판 IMF 환란’을 맞고 있는 한인 사회의 어려움을 살펴보았다.   

월스트리트 인근에서 네일 가게 운영하는 조 애니 씨
“9·11 테러 때보다 더해…올겨울이 고비 될 듯”

“매주 가게를 찾아오던 손님이 어느 날 갑자기 안 나타나면 ‘직장에서 해고됐구나’ 하고 생각하죠.”
사상 최대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맨해튼 월스트리트. 이곳에서 다섯 블럭 떨어진 존스트리트에서 작은 네일 가게를 운영하는 조 애니 씨(44)는 월스트리트발 금융 위기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조씨는 “9·11 테러도 모자라 이제는 금융 위기 폭탄까지 로어 맨해튼을 강타했다”라고 체념하듯 말한다. “9·11 테러 전에는 은행 손님들이 많았다. 대부분 홀세일(도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테러 이후 많이 없어졌고, 이제 금융 위기까지 닥쳤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정부에서 7천억 달러 구제금융 법안을 내놓았지만, 그런다고 우리 같은 스몰비즈니스가 살아나겠나. 기대도 안 한다.” 조씨는 지난 1996년 다른 사람이 운영하던 지금의 네일 가게를 인수했다. 고객 관리를 철저히 하다 보니 2001년까지는 장사가 제법 잘되었다. 그러나 9·11 테러가 강타한 뒤 가게는 심한 타격을 입었다. 업소가 월드트레이드센터(WTC)에서 불과 세 블럭 떨어져 있어 그야말로 테러의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테러 이후 2~3년을 고생하다가 1년은 잘됐다. 그러다 또 안 되고, 조금 나아지다가 다시 지난해부터 침체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금융 위기까지 닥치니 정말 말이 안 나온다. 솔직히 이 지역 경제가 살아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같은 스몰비즈니스는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리면 두말없이 나가야 한다. 옛날에는 점심 시간이면 가게 밖으로 사람들 머리 밖에 안 보일 만큼 거리가 인파로 넘쳤는데….”

가게에 2주에 한 번씩 들르던 손님이 한 달에 한 번 들르고, 매주 오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일이 종종 생기고 있다. 손님들의 ‘세트 서비스(손가락 10개에 인조 손톱을 다 붙이는 것)’가 줄어들고, 기본인 ‘레귤러 서비스(손톱 다듬기)’만 받는 손님이 늘고 있다.  

“전에는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2~3시까지 손님이 밀어닥쳤다. 그만큼 직장인들도 점심 시간을 고무줄처럼 이용해 가게에서 서비스를 받곤 했다. 그런데 요새는 12시30분~2시면 점심 장사는 끝난다. 분위기가 흉흉한데 직장 상사 눈치 보며 점심 시간에 한가하게 네일 서비스 받으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조씨는 “소원이 있다면 다시 소비자들이 돈을 잘 써서 장사가 잘되는 것”이라면서 올겨울이 고비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맨해튼 32스트리트 한인 타운도 직격탄
유학생·관광객 감소로 식당은 ‘찬물’, 도시락은 ‘불티’

한때 달러당 1천5백원까지 육박했던 환율 폭등의 여파로 맨해튼 32스트리트 한인 타운에도 타격이 크다. 특히 유학생과 관광객들이 줄어들면서 식당을 비롯해 인근 한인 업소들의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 식당업계에 따르면 최근 매출이 20~30% 감소했다.

한인 타운 ‘원조’ 식당의 마윤하 매니저는 “평소 점심 시간에는 유학생과 한국 관광객 손님들이 많았으나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한 지난달 말부터는 유학생 손님들이 거의 없다”라며 울상을 지었다.
마매니저는 특히 “야간 매출이 30% 이상 줄어들 정도로 많이 떨어졌다. 비싼 고기 대신 저렴한 보통 메뉴를 주로 주문하고 술도 자제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신 인근 한인 슈퍼마켓과 분식집에서는 저렴한 ‘도시락’이 날개돋힌 듯 팔려나가고 있다. 3~4달러를 아끼는 알뜰족이 크게 늘고 있고,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는 유학생, 직장인들도 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을 주 고객으로 하는 한인 운영 백화점들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 명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코스모스백화점에 따르면 유학생 손님이 많이 줄었고, 씀씀이도 20% 이상 축소되었다. 유학생들이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서점 역시 환율 급등의 타격을 받고 있다.

한인 타운에 있는 ‘고려서적’ 직원 김태수씨는 “한국 서적의 경우 대부분 유학생들이 주 수요층이었는데 환율이 급등한 후부터는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라고 말했다.

역시 유학생들을 많이 상대하는 한인 타운 휴대전화 가게 ‘트라이존와이어리스’를 운영하는 이재랑 사장은 “보통 10월이면 매출이 올라가는 편인데도 환율이 급등한 뒤부터는 매출이 30~40% 줄어들었다”라며 답답해했다.

외교관-지사·상사 주재원들도 고통
“한국에서 주는 월급 30% 이상 줄어 앉아서 감봉”

뉴욕에 체류 중인 한국 정부 기관 파견 공무원과 기업 지사·상사 주재원들 역시 신음하고 있다. 
정부 주요 부처는 직원들의 월급을 달러로 환전해 송금하는데 미국의 경우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현지에서 실제로 손에 쥐는 봉급이 30% 이상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별도의 해외 근무 수당은 달러화로 보전이 되고 있지만 큰 도움이 안 된다.

뉴욕 총영사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파견나온 외교통상부 소속 영사들은 ‘본부 본봉’과 ‘재외 근무 수당’ 두 가지를 수령하는데, 이 중 본부 본봉은 한국 내 환율에 따라 달러화로 바꿔서 공관 계좌로 입금된 뒤, 개인 계좌로 송금된다. 4백만원의 본봉을 받던 외교관은 올초 4천 달러를 수령하다가 최근에는 3천 달러로 본봉이 줄어든 셈이다. 외교관 이외에 정부 각 부처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들 역시 일부를 제외하고는 같은 월급 체계를 적용받아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관은 “재외 근무 수당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고 한국에서 월급을 가져다 써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환율 폭등으로 감봉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재외 근무 수당 역시 20년째 인상이 안 되고 있는데 갑자기 환율이 폭등하면서 생활이 빠듯할 정도이다”라고 하소연했다.

뉴욕 등으로 출장한 공무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외 여비’ 명목으로 숙박비 등을 지원받지만, 환율 폭등 이전에도 이미 뉴욕에서는 호텔에 투숙하려면 출장비에 오히려 자비를 더해 투숙해야 했다. 요즘 같은 환율 상황에서는 출혈이 더 심각하다.

뉴욕의 지사·상사 주재원, 정부 기관 현지 사무소 파견 근무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현지에 독립 법인화되어 기업에 파견 나온 주재원들은 당초 현지에서 달러화로 임금을 받고 있어 별다른 피해가 없다. 그러나 독립 법인화되어 있지 않은 규모가 작은 기업의 지사·상사 근무자들은 한국에서 받는 임금을 기준으로 한국에서 달러화로 보내준 것을 미국에서 월급으로 지급받고 있어 피해가 크다. 중소기업진흥공단 뉴욕사무소 전병원 과장은 지난해에 비해 환율이 30% 이상 오르면서 월급도 30% 줄었다며, 식비와 생활비를 최대한 줄이고 있지만 절약에도 한계가 있다고 푸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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