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돈을 버는 시대의 비극
  • 김재태 편집부국장 (jaitai@sisapress.com)
  • 승인 2008.09.2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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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절기를 잊은 듯 따가운 햇살 아래 둘러앉은 피붙이들 가운데 누군가 그들의 부재에 대해 짧게 서운함을 표시했지만 그뿐이었다. 연휴 기간이 유난히 짧은 데다가 살림살이까지 갈수록 힘들어지는 마당에 적지 않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귀향 길을 선택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터였다. 어찌어찌 하여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인 이들의 얼굴에도 곤궁의 그늘이 깊게 패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풍요와 안락을 상징하던 민족 최고의 명절이 그렇게 황망히 지나갔다.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살림 형편과 우울한 정치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맞은 올해 추석은 유난히 어수선하고 허전했다. 명절나기보다 허기진 자신의 생계를 챙기는 일이 더 급해진 사람들은, 고향에서도 타향에서도 마음 놓고 안식하지 못했다. 지역구에 내려간 선량들이 주민들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았다는 소식도 매년 명절연휴의 끝자락에 노래의 후렴구처럼 흘러나오는 얘기이지만, 올해에는 그저 그런 상투적 수사로만 들리지 않는다.

즐거워야 할 명절을 시름에 젖게 하고 “외환위기 때보다 더하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만큼 상황이 어두운데도 정부는 여전히 ‘불신의 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당장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회사들의 위기 또는 파산 사태에 대해서도 경제 정책 수장이 “우리 경제가 충분히 견딜 만한 수준이다”라는 평가를 내놓아 뭇매를 맞기까지 했다. 이 정부가 시장의 생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지역구에서 민심의 회초리를 맞고 많은 반성을 했다는 국회의원들도 민초들의 상실감을 정말 제대로 깨닫고 왔는지 알 길이 없다.

최근 발생한 미국발 금융 위기는 달리 말해 ‘신뢰의 위기’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정책 당국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위기를 부추긴 것이다. 이는 또한 돈이 돈을 버는 기묘한 시대에서 ‘머니 판타지 게임’에 깊이 빠져든 자본 빅뱅 사회의 위기이기도 하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를 뒤흔든 이번 사태는 고수익에 혈안이 되어 파생 상품 등으로 외연을 넓혀온 투자은행들의 위험한 질주가 빚어낸 비극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파생 상품과 같은 ‘독 묻은 과일’은 아직도 여기저기에 탐스럽게 열려있고 그것을 좇는 자본들의 판타지 게임이 계속되는 한 위기는 언제든 다시 고개를 내밀 수 있다.

미국의 금융 위기는 국가 경제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신뢰 관리는 아직껏 미덥지 못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야권에서 주장하는 강만수 장관 경질요구에 대해 “장관을 임기 몇 개월 만에 물러나게 하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해칠 수 있다”라는 말로 에둘러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정작 ‘신뢰받지 못하는 장관’이 이끄는 경제 정책이 국민과 시장으로부터 어떻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복잡 미묘한 전대미문의 시장 앞에 서 있다. 이 새로운 시장의 정신연령은 어쩌면 정부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장에 맞서 정부가 지난번에 내보인 환율 정책처럼 어설픈 대응을 반복한다면 백전백패할 것이 뻔하다. 위기의 실체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바르게 대응하기 위해, 지금은 소의 고삐를 잡고 이끄는 소몰이의 뚝심보다 노련하고 믿음직한 휘파람으로 양들을 모는 양치기의 지혜가 더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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