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차이고 저리 밟힌 수난의 ‘불심’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8.09.0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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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과 불교의 역학 관계/이승만 정부, 비구–대처 갈등 조장 …잇단 ‘법난’에 저항 세력으로 변신
▲ 1994년 4월10일 종단 개혁의 의지를 담은 전국승려대회가 조계사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권력과 불교계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관계’일까. 광복 이후 불교계는 내분과 외압 등으로 갖은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권력과의 ‘밀월’은 짧았고, ‘냉각기’는 길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8·15 해방 정국을 맞으면서 불교계에서는 자체 정화 운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한국전쟁 등으로 정화 운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특히 비구-대처 간의 종권 경쟁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개입했다. 이대통령은 지난 1954년 5월21일 ‘불교 유시 담화’를 내놓았다.

처자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승려가 아니기 때문에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1954년 당시 우리나라 대처승은 7천여 명인 데 비해 비구승은 2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비구승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대통령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대처승을 추방한 까닭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교계에서 해석이 분분하다. 이처럼 정권의 강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비구-대처 간의 갈등은 식지 않았고, 오히려 더 대립하는 양상을 띠었다. <우리가 살아온 한국 불교 백년>의 저자인 김광식씨는 “결과적으로 이승만 집권 당시 기독교는 엄청난 성장을 한 반면에 불교는 내적인 갈등과 그 후유증으로 큰 침체를 겪었다”라고 평가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권에서 억눌렸던 대처승측이 조계사 탈환을 시도하면서, 또다시 비구-대처 간의 종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불교계의 이같은 내분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겪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사회악 일소 차원에서 불교계 분규에도 개입했다. 박의장은 불교 분규와 관련해서 여러 차례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같은 정권의 의지에 따라 불교계는 분규를 해소하면서 비구-대처 양측은 1962년 4월11일 통합 종단인 조계종을 출범시켰다. 이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8년 동안의 대립과 분규를 일거에 제거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통합 종단 조계종 출범 후에도 각종 분규ᆞ사건 잇따라

그렇다고 해서 비구-대처 간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1968년 11월 대처승들은 ‘제30회 중앙종회’에서 통합 종단의 백지화를 선언했고, 1970년 4월16일 태고종으로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로써 비구(조계종)-대처(태고종)는 각각의 종단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태고종 출범을 전후해서 여러 군소 종단이 생겨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사찰은 불교 재산이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관광 자원이기 때문에 정부와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전국에 있는 주요 사찰의 운영 실태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3년부터 전국 유명 사찰에서 관람료를 징수하도록 했다. 이에 조계종단에서는 정부의 사찰 개입 문제를 검토해 ‘사찰 주권’을 선언한 백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법적 소송 등을 통해 석가탄신일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1975년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끝나고 1980년으로 접어들면서 조계종단은 3년 동안의 분규에서 벗어나 모처럼 안정 국면을 맞이했다. 같은 해 4월 취임한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권력의 간섭을 배제한 자율적인 종단 운영과 종단의 자체 정화를 천명했다. 이에 조계종 총무원은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지지했던 ‘전한국불교회’와 ‘대한불교총연합회’를 탈퇴했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 성명을 거부했다. 그러자 ‘한국 불교의 최대 치욕 사건’으로 불리는 ‘10·27 법난’이 발생했다.

1980년 10월27일 새벽,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3천여 사찰에 계엄군이 난입해 수색과 연행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계엄사령부는 “불교계가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동·발호하는 비리 지대로서 자력으로는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 부득이 사회 정화 차원에서 철퇴를 가한다”라고 발표했다. 며칠 후인 10월30일에도 간첩 소탕 작전을 명분으로 또다시 사찰을 수색하고 승려들을 연행해갔다. 그리고 11월14일 계엄사령부는 수사 과정에서 승려와 재가자 55명을 연행했고, 98명을 참고인으로 조사해 폭력 행위와 금품 수수, 사찰 재산 착복 등 각종 부정 행위로 승려 10명, 재가자 8명을 구속했으며, 32명은 불교정화중흥회의에 처리를 위임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이 편찬한 <조계종사(史)>에 따르면, 이때 연행된 인물 중에는 이서옹 전 종정, 송월주 총무원장 등 종단의 주요 인사가 포함되었으며, 계엄사의 발표보다 훨씬 많은 수의 승려와 재가자가 연행·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도 뒤따랐다.

한마디로 ‘불교판 삼청교육대’였던 셈이다. ‘10·27 법난’에 대해 조계종은 “신군부가 여러 종교 가운데 불교를 선택한 것은 새로 출범한 총무원 체제가 종단 자율 운영을 천명함으로써 신군부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고, 그동안 지속되었던 종단 불안정과 분규, 상호 비방 투서의 남발 등이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앞서 언급한 김광식씨는 “그 법난은 신군부의 정치 권력 장악을 위한 구도에 불교계가 희생된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이후 불교계 개혁 세력은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 단체들과 연합해 반독재 투쟁 대열에 합류했다. 1986년 6월에는 불교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정토구현 전국 승가회’(승가회)가 출범했다. 승려 2백21명으로 출범한 승가회는 이후 개헌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개헌 서명운동을 펼쳐나갔다. 같은 해 9월 승려 2천여 명이 참석한 전국승려대회에서는 불교 관련 악법 철폐와 부천서 성고문 사건 진상 규명, 수입 개방 압력 거부, 10·27 법난 해명 등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결의를 하기도 했다.

▲ 조계사가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에 항의하며 내건 현수막. ⓒ시사저널 황문성

김영삼 정권에서는 뇌물 혐의로 안팎 곱사등 되기도

김영삼 정권에서도 불교계와 권력은 충돌했다. 1994년의 ‘3·29 법난’ 이른바 ‘조계종 폭력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1994년 1월, 국방부 특검단은 상무대 이전 공사와 관련해 청우종합건설대표인 조 아무개씨를 뇌물 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기도 했던 조씨가 상무대 이전 사업 대금 가운데 2백23억원을 비자금으로 조성해 이 가운데 80억원을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것. 하지만 그 80억원은 서의현 총무원장을 통해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 쪽에 제공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불교계 개혁 세력이 ‘범승가 종단개혁 추진회’를 결성해 서원장 사퇴를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3월29일 새벽, 서원장이 동원한 조직 폭력배 3백여 명과 경찰 등이 조계사 총무원에서 농성하던 스님과 재가 불자들을 습격해 강제 연행함으로써 또 한 차례 수모를 겪었다. 이에 불교계는 김영삼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고, 마침내 서원장이 물러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2008년 9월, 이명박 정부에 ‘성난 불심’은 또다시 권력과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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