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사람’ 갔지만 걱정은 태산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08.2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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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직면했던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 전격 사임 … 부시 행정부 “핵을 어쩌나”

▲ 8월18일 사임한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가운데)이 대통령 관저를 떠나기 앞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지난 8월18일 사임했다. 헌법 위반 혐의에 따른 탄핵을 하루 앞두고 내린 결단이다. 몇 달 전부터 무샤라프의 용도 폐기를 주장해온 미국 관리들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의지해 대테러전을 전개해온 부시 행정부는 타격을 입게 되었다. 무샤라프 정부는 1999년 무혈 쿠데타로 집권한 후 근 9년간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었다. 무샤라프가 파키스탄 정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미국은 연립 정권에서 선출되는 새 민간인 지도자를 상대해야 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 어떤 후임 대통령도 파키스탄 정부를 전복하려는 탈레반 저항 세력과 맞서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현실이다. 이것이 미국의 최대 고민이다.

무샤라프는 TV로 중계된 한 시간여의 사임 연설에서 “탄핵에서 이기든 지든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나의 미래를 국민의 손에 맡긴다”라고 아리송하게 말했다. 사임 후의 그의 거취를 놓고 벌써 망명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 관리들은 무샤라프가 국내에 머무를 것이며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후임 문제는 연정을 구성한 정당 간에 치열한 경쟁을 유발할 것이 확실시된다. 쿠데타로 집권해 철권 통치로 일관해온 독재자는 1억6천5백만명의 국민을 못살게 한 것도 모자라 새로운 시련을 유산으로 남겼다. 부시 행정부도 골머리가 아프다. 무샤라프를 과신하고 파키스탄 내 다른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 것이 잘못이었다. 다급해진 미국은 복잡한 파벌로 구성된 연립정부에서 새로운 동지를 물색하고 있으나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와 대결할 의지를 보이는 후보를 찾기가 쉽지 않다.

파키스탄과 미국 정보기관 간 불신도 깊다. 양국 관계의 신뢰는 9·11 사태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사면초가의 국면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파키스탄 핵무기에 대한 통제 체제가 얼마나 버틸까 하는 것이다. 부토 전 총리의 암살, 원인 불명의 비행기 추락, 수시로 일어나는 쿠데타 시도 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핵 통제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권력의 구심점이 무너지면서 상황이 변했다. 파키스탄이 핵보유국이 된 이후 핵에 대한 우려가 이처럼 심각하게 제기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탈레반에 무지한 연립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상황 악화시킬 수도

또 다른 걱정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이곳의 전황은 파키스탄을 후방 기지로 이용하는 탈레반과 알카에다 세력에 의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무샤라프는 수년 전부터 자국 내 민병대를 주축으로 한 저항 세력에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고, 그때부터 미국은 무샤라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중 플레이를 한 것이 분명하다. 9·11 사태 이후 미국으로부터 총 10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아 테러 조직을 소탕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탈레반 세력과 내통했다는 것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판단이다. 게다가 연립정부는 탈레반의 실체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부시의 급선무는 테러 조직의 근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대처할 새 지도자를 찾는 일이지만 전망은 어둡다.

파키스탄 민병대에 대한 소탕 작전은 처음부터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미국의 싸움에 끼어들어 민병대와 사투를 벌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 현지 분위기다. 민병대를 소탕하는 것이 파키스탄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득해보지만 먹히지 않는다. 연립정부가 최근 소탕 작전을 강화했으나 속셈이 무엇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연정 지도자들에게 대테러전 지속을 촉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 텍사스의 크로포드 목장에서 무샤라프의 사임 소식을 들은 부시 대통령은 아무런 성명도 발표하지 않았다. 고든 존드로 백악관 대변인이 파키스탄의 민주적 정권 이양과 대테러전 지원을 기대한다는 부시의 희망을 전한 것이 전부다. 이를 두고 부시는 무샤라프 없이도 대테러 전을 수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추측이 나왔다.

무샤라프의 사임은 지난해 그가 군 최고 사령관직에서 물러나고 지난 2월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예견되었다. 그때부터 부시 행정부는 군부와 정보기관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연립정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CIA와 국방부의 일부 관리들은 무샤라프의 퇴장을 계기로 파키스탄 정보국이 북부 부족 지역의 민병대와 유대를 강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저항을 더욱 격화시킬 것이 뻔하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최악으로 간다는 얘기다.

▲ 지난해 12월12일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암살된 베나지르 부토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가 지난 1월15일 기자회견을 열어 취재진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의 대파키스탄 정책, 반미 이미지 개선이 큰 변수로 떠올라

누가 후임자가 되느냐는 약 50 내지 100개로 추산되는 핵무기의 운명에 대한 우려와 맞물려 온갖 추측을 자아낸다. 미국 관리들은 공식적으로는 핵무기 관리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무샤라프가 없는 핵 관리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숨기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은 극단주의 그룹이 파키스탄에 침투해 핵무기를 수중에 넣는 경우다. 미국은 그동안 파키스탄 관리들을 훈련시켜 안전한 핵 관리를 꾀해왔다. 그러나 이런 관리 체제는 무샤라프의 건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무샤라프는 사임 연설에서 연립정부가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면서 탄핵을 추진했다고 항변했다. 연설 마지막에 주먹을 불끈 쥐고 “파키스탄이여, 영원하라”라고 외치는 그의 모습은 사임 이후의 정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연정은 10일간 탄핵을 준비한 후 무샤라프를 헌법 위반 혐의로 기소할 절차를 밟아왔다.

그의 퇴장은 건국 61년의 역사에서 절반 이상의 기간을 군부가 지배한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오후 1시에 사임을 발표한 무샤라프는 오후 5시 의장대의 환송을 받으며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인접한 군부대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며칠 머무르다가 자신의 사저로 갈 예정이다.

올해 들어 과도 총리로 일한 상원의장 미안 숨로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의회와 4개 주에서 30일 내에 새 대통령을 선출할 때까지 직무를 수행한다. 후임 물망에는 암살된 부토 전 총리의 남편이자 인민당 당수인 알리 자르다리가 떠오르고 있고, 본인도 대통령직을 원하고 있다. 그는 각종 부패 혐의에 연루되어 논란이 예상된다.

그러나 마땅한 대안도 없다. 전 국방장관 샤반 미라니가 유일한 대체 후보로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누가 후보로 등장하든 지루한 경합이 불가피해 보인다. 무샤라프의 퇴장이 당장 정국 혼란을 초래할 것이나 장기적으로는 희망을 안겨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미국이 원조를 대폭 증액하고 새 지도자와의 유대를 잘 구축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논평했다. 또한 새 대통령이 무샤라프처럼 이중 플레이를 하지 않고 대테러전에 전적으로 협조한다면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호기를 맞을 수 있다. 다만 대테러전을 미국의 전쟁으로 인식하는 다수 파키스탄 국민의 태도가 걸림돌이다. 미국은 그동안 대테러전 때문에 무샤라프의 독재를 묵인 내지 방조함으로써 반미 감정을 심화시켰다. 대규모 원조와 반미 이미지 개선 여부가 미국의 대파키스탄 정책에서 양대 변수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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