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ᆞ인적 끊겨 ‘흉물’이 되었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8.08.0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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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가 유치한 영화ᆞ드라마 세트장, ‘관광 자원’ 구실 못한 채 방치된 곳 많아

 

충북 제천시가 12억원을 들여 건립한 드라마 세트장(위)은 매년 보수비로 4천여 만원을 쓰고 있지만, 찾아오는 관광객이 드물어 수익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유치한 영화·드라마 세트장이 애물단지로 변했다. 일부 세트장은 관광 자원으로 홍보하지만 관리가 안 되어 흉물로 방치되고 있다. 지자체들은 세트장 유치를 위해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억 원의 혈세를 지원했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가 종영된 뒤에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흥행에 기대어 대박을 노리다가 쪽박만 찬 꼴이다. 연간 보수·관리 비용만 축내고 있어 말 그대로 ‘돈 먹는 하마’로 전락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전국 각지에서는 무분별하게 세트장이 건설되고 있다. 수익성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묻지마식 투자’가 가장 큰 문제다. 일부 지자체들은 세트장을 건립한다며 천혜의 자연 경관까지 해쳤다.

지금까지 지자체가 20억원 이상 지원한 세트장은 SBS <사랑과 야망>(전남 순천·63억원), KBS <해신>(전남 완도·50억원), SBS <서동요>(충남 부여· 50억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경남 합천·45억원), KBS <불멸의 이순신>(전북 부안·40억원), SBS <대망>(충북 제천·20억원) 등이다. 일부 세트장은 공사 부실 등으로 촬영 후 건물이 무너지거나 홍수나 화재로 유실되었다.

 관리 소홀로 폐가가 된 영화 의 집 세트장과 영화의 한 장면.                                                                                                                          ⓒ시사저널 정락인

경남 남해군에 있는 가천 다랭이 마을은 영화 <맨발의 기봉이>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다랭이 마을 곳곳에는 ‘맨발의 기봉이 영화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영화 세트장을 마을의 관광 자원으로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거액 투자하고도 테마파크 조성 등으로 못 이어져 수익성 ‘제로’


그러나 <맨발의 기봉이> 세트장은 ‘관광 자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흉물이 되어 있다. 영화 속 기봉이 집 마당에는 어른 키만한 잡초가 자라 있고, 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낡았다. 방안은 더 심각하다. 벽지가 곳곳에 뜯겨 있고 장판은 위아래가 뒤집어진 채 시커먼 흙먼지로 뒤덮여 있다. 소품으로 쓰였던 시계, TV, 전화기, 재봉틀, 액자, 베게 등이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영화에서 본 순수와 감동 그리고 정겨움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영화 속 모습을 떠올리며 세트장을 찾는 관광객들의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다.

전남 광양에서 다랭이 마을을 찾은 정은영씨(39)는 “영화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일부러 찾아왔다. 그런데 폐가가 된 세트장을 보니 영화에서 느꼈던 감동마저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맨발의 기봉이>를 제작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약 25억원이다. 영화가 개봉되자 2백50만명의 관객이 몰려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제작사측에 따르면 기봉이 집 세트장을 짓는 데 수천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 제작사는 왜 촬영이 끝난 후 세트장을 철거하지 않은 것일까. 세트장 부지 임대 기간이 끝나면 영화사에서 자진 철거하는 것이 원칙이다.

공동 제작사인 지오엔터테인먼트 송찬호 PD는 “철거하면 제작사측은 더 이득이다. 자재를 중고로 판매하거나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세트장을 보존해서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지자체와 마을에 기증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자체와 다랭이 마을이 세트장을 관광 자원으로 홍보하면서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생긴 문제라는 것이다. 입장료가 없어 수익 창출이 안 되는 것이 관리 소홀의 가장 큰 원인이다. 그렇다고 해당 지자체가 사람을 상주해서 관리할 수도 없다. 이렇게 관리가 안 된 채 방치된 영화 세트장은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영화 세트장은 그나마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낭비 요인이 덜하다. <태조 왕건> <주몽> <장길산> <연개소문> <서동요> 등 대형 TV 드라마 세트장이 문제다. 대표적인 지자체가 충북 제천이다. 청풍호를 끼고 있는 제천에는 KBS <왕건>, SBS <장길산>과 <대망>의 세트가 있다. 제천은드라마 세트장 때문에 여론의 호된 뭇매를 맞았다. 때문에 제천시는 ‘세트장’ 노이로제에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단체 “성공 가능성 불투명한 곳에 혈세만 낭비” 성토

<시사저널> 취재진은 지난 7월 말에 제천 <태조 왕건> 세트장을 찾았다. <태조 왕건> 세트장은 제천시가 12억원을 들여 건립한 야외 촬영장이다. 고려 시대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 포구를 재현해놓았다. 왕건의 집과 초가집 9동(28채), 수군 관아 1동(기와집 4채), 초가 정자 4동, 기와 정자 1동, 망루 2동, 성벽 등이 조성되어 있다. 당초에는 4억5천만원을 들여 고려 군함 3척을 건조했으나 관리 부실로 철거한 상태다. <태조 왕건> 세트장은 건립 초기인 2003년에는 연간 30만명 이상이 다녀가면서 4천여 만원(중·소형 승용차 1천원, 대형차 2천원)의 주차료 수익을 올렸으나 일시적인 효과에 그쳤다.

취재진이 세트장을 찾은 날은 휴가철인데도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일한 수익원인 주차장은 하루 종일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간혹 관광객이 찾아오기는 했으나 그 숫자는 미미했다. 제천시는 매년 세트장 보수비로 4천여 만원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보존 상태는 그나마 양호했으나 곳곳이 낡아 담벼락이 허물어진 곳도 있었다. 세트장 입구에 있는 매점 겸 음식점은 손님이 없어 문을 닫는 날이 더 많다.

친구와 함께 세트장을 찾은 김성탁씨(24)는 “제천에 여행을 왔다가 세트장에 왔는데 솔직히 기대 이하다. 옛날 가옥들 외에 볼 것이 없다. 관광객들이 없다고 한숨만 쉬지 말고 관광객을 끌어올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국 각지에 건립된 영화·드라마 세트장의 실정도 비슷하다. 제대로 된 수익을 창출하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영화 세트장이 있는 지자체의 시민단체들은 애초부터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한 촬영지에 거액을 투자한 것은 도박에 가까운 무모한 일이라며 자치단체를 성토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의 인기가 끝날 때 세트장의 생명도 마감한다는 지적이다. 해당 지자체들은 테마파크 조성 등 장기적인 수익 창출을 모색하고 있지만 섣불리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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