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없는 ‘디자인 서울’
  • 정준모 (문화정책.미술비평) ()
  • 승인 2008.07.22 15:3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민 외면하고 혼자 ‘아름다운 서울’ 만드는 서울시…“짝퉁을 집어치우라”
ⓒ연합뉴스

’아름다운 서울, 살기 좋은 서울’을 향한 서울시의 열정은 서울을 디자인하기 바쁘다. 남산 르네상스, 도시 갤러리, 디자인 서울 거리 조성 사업, 공공 미술, 서울의 상징, 서울 색, 서울 서체 개발 보급, 야간 경관 업그레이드, 옹벽, 방음벽 디자인 개선 사업, 자원 회수 시설 이미지 개선 사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업들이 물밀듯이 시행되면서 곳곳에서 서울의 얼굴을 바꾸어놓고 있고, 바뀌어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것을 마다할 것 없는 시민들로서는 “이제 시민으로서 좀 대접을 받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 보면 뭔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디자인 서울’에 시민들은 그냥 들러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동네를 아름답고 편안하게 꾸민다는 데 불평할 시민들은 없겠지만 시민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는 처지’라는 느낌 때문이다. 즉 시민들의 삶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업들이 너무나 일시적으로 벌어지면서 무엇에 쫓기는 듯이 서두르고 정작 시민들은 이런 정책 결정과 사업의 구체적인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사실 아름다운 서울을 만드는 시도는 그동안 많이 있었다. 물론 그 수준이 학교 담장에 벽화 그리기, 고가도로 치장하기, 육교 정비 사업, 담장 허물기 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시행되고 유지·보수되는 일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공공 미술’이라는 이름의 예술품에 대해서 애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지역 주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아끼고 다듬고 보전해갈 여지를 주지 않은 채 마치 구휼 사업 하듯 예술가들에게 맡겨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것이 퇴색되고 칠이 벗겨지고 하면서 또 하나의 흉물이 되었다. 유지보수, 즉 A/S는 하지 않은 채 공급만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연전에 공공 미술 사업으로 시행한 삼선교 일대의 공공 미술을 비롯해서 공공 미술 시혜지 곳곳에서 여전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주민들은 얼마간은 공공 미술의 덕을 톡톡히 본다고 생각하면서 예쁘게 치장된 골목길을, 높은 계단을 오르내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하고 칠이 벗겨지면서 시민들에게, 주민들에게 주는 시각적·감성적 불편함은 어떠했을까.

환경 없는 공공 디자인이 무슨 소용인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지역민들, 시민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없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마을의 공공 미술을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애정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디자인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 좋은 것, 가치 있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래서 오직 삶의 윤택함을 공공 미술이라는 이름의 미술 또는 디자인을 ‘배급받아’ 사는 부류라는 인식 때문이다.

비록 ‘에르메스’를 ‘헤르메스’라고 발음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미감과 자부심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수용자의 감성은 철저하게 배제된 채 오직 공급자가 만들어준 음식만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공공 미술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공공 미술 또는 공공 디자인에서 ‘공공’은 언제나 ‘을’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공급자인 지방 정부가 ‘갑’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의 공공 미술이란 아무리 유명 작가가 참여했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짬밥을 매일 먹어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최고의 요리사와 영양사가 합작으로 만든 보기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청국장이나 김치찌개에 맛이 길들여져 있는 우리나라 고객들의 입맛을 헤아리지 않고서는 그 식당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공공 디자인과 공공 미술의 이해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공공 디자인이란 어반 디자인 또는 환경 디자인과 같이 광의의 개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시각매체가 시민들의 삶의 편이함과 쾌적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공공 디자인은 가시적인 성과와 변화를 실감하게 하기 위해 외피적 변화에 치중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에 반해 공공 미술이란 이름 그대로 그들의 문화, 시각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미술가들이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삶에 기반을 둔 미술이다. 시민들의, 지역 주민들의 의견과 참여가 빠진다면 예전에 광주비엔날레가 시행한 바 있는 ‘참여 관객 제도’가 결국은, 작가와 참여 관객의 소통 부족으로 참여 관객 없는 참여 관객제가 되었던 것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디자인 서울 사업’을 살펴보면 여전히 이런 오류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시민들이 빠진 채 행정가들과 디자인 전문가들만의 디자인 서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공공성이 전제되어야 하는 서울시의 ‘디자인 서울 사업’ 등 각종 사안에 자문하는 주요 인사들 중 몇몇은 화상 등 관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자신들이 자문하면서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공급하고 시행하는 일까지 하거나, 또는 자신들의 사업과 관련된 내용의 자문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모습으로 비친다면 모처럼의 좋은 뜻이 훼손될 수도 있겠기에 기우에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 반포대교의 인공 섬 조감도(오른쪽)를 보면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있는 '문화의 다리'(왼쪽)와 닮았다.



▲ 반포대교의 낙하분수 조감도(왼쪽)는 뉴욕의 5곳에 설치된 엘리아슨 울라퍼의 폭포(오른쪽)를 떠올리게 한다.


시민 빠진 사업은 결국 전시 행정

사실 서울의 많은 도시적 요소와 환경 그리고 시스템 가운데는 선진국의 그것을 모방하고 그것이 우리식으로 체질화되면서 우리의 것으로 자리 잡은 것들이 많다. 이것은 농경 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우리가 그 전통과는 다르게 급속하게 산업화·도시화로 이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도시로 몰려들면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일이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것, 우리의 것, 창의적인 것보다는 우선 급하다 보니 서구의 제도와 방법들을 서둘러 우리네 삶에 적용시켜야 했다. 그래서 우리의 서울, 대한민국을 다녀보면 외국 여행길에 어디서 본 듯한 그렇고 그런 것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한국을 ‘키치 공화국’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대한민국 예식장이 어느 곳이나 유럽의 성곽을 흉내 낸 디즈니랜드 풍의 성 모양을 하고 있고, 유행처럼 ‘문화센터’ 또는 ‘컨벤션’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필자는 해외에서 인천공항을 입국하면서 항상 갖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으러 내려갈 때 보이는 물이 흐르는 벽이다. 그것은 필자와도 친교가 있는 에릭 오어(Eric Orr, 1939~1998)의 작품과 너무도 닮아 있다. 그래서 한 번쯤 인천공항에 전화를 해서 물어본다는 것이 게으른 탓에 아직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에릭 오어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다양한 분수와 어항들이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짝퉁을 만들어도 유치하게 아이디어를 냈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서양에서 또는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성공한 공공 디자인, 공공 미술의 사례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나라에, 서울에 적용시키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한다. 외국에서 과일이나 흙 같은 것을 휴대하고 입국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은 외국의 풍토병 등 여러 가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인 것처럼 외국의 그것은 그곳의 자연 환경이나 도시 경관, 도시 구조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어서 우리 서울과 우리 지방 도시들과는 맞지 않는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마치 서울월드컵경기장 앞 한강에 있는 세계 제1의 높이를 자랑하는 ‘한강 분수’처럼 말이다. 세계 최고의 높이는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지만 사실 이 분수는 스위스 레만 호수에 있다는 고사 분수를 본뜬 것이다.

공공 디자인은 제2의 자연이다

그런데 서울의 분수와 레만호의 분수의 차이는 그 자연 환경과의 조화에 있다. 그저 높이에만 열을 올린 나머지 도시와 한강과는 상관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세계 제1’에 집착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사실 세계 최고의 고사 분수는 미국 애리조나 파운틴힐에 있으며, 다음은 북한 평양 대동강과 스위스 레만호의 것이 공동 2위를 다툰다고 한다.

이렇게 환경과 조건을 무시한 짝퉁에 대한 야심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울시가 야심차게 발표한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인 반포대교의 인공 섬 설치 계획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어 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의 원본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는 인공 섬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있는 유명한
‘문화의 다리’다. 1999년 아이디어가 나와 약 5년 뒤인 2003년에 완공된 이곳은 미국의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비토 아콘시와 오스트리아 건축가 푼켄호퍼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런데 인공 섬의 마감재와 아이디어가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올 연초 시장과 관계자들이 그라츠를 다녀오고 나서 바로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 인공 섬의 그래픽 이미지가 나와 있지만 이것을 누가 설계하고 디자인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짝퉁’이라는 의구심을 더 사는지도 모르겠다.

환경 단체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는 반포대교 낙하 분수에 대해서 그 아이디어의 천박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군청 소재지 나이트 클럽의 조명같은 원색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춤추는 분수처럼 물이 뿜어나오는 분수의 모습을 인터넷에서 감상하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반포대교의 낙하 분수 조감도는 뉴욕은 물론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뉴욕의 5곳에 설치된 엘리아슨 울라퍼의 폭포를 떠올리게 한다.

국내 언론에도 보도된 바 있는 그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는 뉴욕의 명물인 브룩클린 다리의 교각에 물을 끌어올려 폭포를 만든 외에도 맨해튼을 이어주는 중요 지점에 인공 폭포를 만든 것이다. 그 신선함과 청량함은 공공 미술의 백미로 미국의 공영방송 PBS가 특집을 마련할 정도다. 우리가 세계 최고 높이로 쏘아올리고자 고민할 때 역으로 거꾸로 낙하하는 분수를 만들었다는 것도 신선하지만, 작가의 아이디어에 의해 그것이 구체화되면서 얻게 되는 브랜드 가치까지를 포함한다면 역시 ‘누가 했느냐’도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그 많은 프로젝트에는 주인, 즉 창조자가 없다. 분수나 인공 섬은 물론 서울시가 야심차게 발표한 서울 서체나 서울의 색도 시행자의 대표격인 서울시나 시장의 이름은 도드라지지만 만든 이는 익명에 가깝다. 새롭게 디자인했다는 서울의 상징물 ‘해치’도 누가 한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디자이너가 없는 디자인이 신뢰를 얻기는 힘들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