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한다고 ‘일괄 사표’ 빈 자리는 정부 몫?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8.07.2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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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공기업의 임원 재신임 프로젝트, 가동 석 달째 ‘잡음’
ⓒ그림 최익견

”나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최근 만난 한 금융 공기업 임원의 푸념이다. 정부는 지난 4월 중순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 기관 CEO들로부터 일괄 사표를 받았다. 당시 전문성이 떨어지는 인사를 경영에서 배제해 혁신을 단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동안 만연했던 ‘보은 인사’나 ‘낙하산 인사’ 관행을 원천 봉쇄한다는 취지도 곁들였다. 그러나 실제는 정부의 이런 명분이나 취지와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재신임 프로젝트’가 가동된 지 두 달 넘게 흘렀지만 오히려 잡음만 커지고 있다. 기술보증기금과 증권예탁결제원의 경우에는 수개월째 수장이 없는 상태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업무 차질이 생겨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금융 공기업의 임원은 “일괄 사표를 받아놓고 제대로 충원도 하지 못하고 있다. 공모를 통해 기껏 뽑아놓으면 (청와대에서) ‘퇴짜’를 놓는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반복될지 모르겠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신용보증기금이나 주택금융공사에서는 낙하산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는 최근 신보 이사장으로 안택수 전 한나라당 의원을 내정했다. 그러자 내부에서는 ‘보은 인사’라며 반발하는 기류가 나타나고 있다. 신보는 현재 19만여 개 중소기업에 28조원을 보증하고 있다. 은행권은 신보의 보증서를 믿고 해당 기업에 자금을 대출한다. 이런 조직의 수장 자리에 정치인 출신을 임명한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던져주는 격’이라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일부 금융기관 ‘낙하산 논란’…신보ᆞ기보 등 일부 감사 ‘일괄 사표’ 거부

주택금융공사는 최근 임주재 전 금감원 부원장보를 사장 후보로 제청했다. 임 사장 후보는 금감원 출신이지만 주택금융 업무를 맡은 적이 없다. 공사 내부에서는 대통령과 같은 ‘경북 출신’ 덕을 본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다.증권예탁결제원의 경우는 아직 사장이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잡음이 일고 있다. 현재 예탁원의 사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는 이수화 전 씨티은행 부행장, 정용선 전 금감원 부원장보 등 5명이다. 예탁원은 7월22일 주총을 통해 사장 후보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회사 내부에서는 이미 이수화 전 부행장이 사장에 내정되었다는 설이 파다하다. 사장 공모 절차는 이 전 부행장을 위한 ‘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포털사이트의 인물 검색 코너에는 이 전 부행장이 이미 ‘예탁원 사장 내정자’로 표기되어 있다. 노조측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지난 7월16일 본사 로비에 파행 조짐을 보이는 사장 공모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이기도 했다.

이청우 예탁원 노조위원장은 “(이수화 전 부행장은) 최근 모 기관의 사장 공모에 참여했다가 부동산 비리 구설에 올라 탈락했다. 정부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하자 논란이 있는 인사의 임명을 강행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해 금융위측은 “현재 진행되는 인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나형호 혁신행정과 사무관은 “모든 인사는 초기에 논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각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여러 절차를 통해 합리적인 인사를 단행했다고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안택수 전 의원 등 사장 내정자에 대해 뒷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안 전 의원은 3대에 걸쳐 재경위 소속 의원을 지냈다. 신보에 대한 세세한 실무는 모르겠지만 방향은 잡아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라고 해명했다.

CEO뿐 아니라 감사 선정 과정에서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감사들에게도 일괄 사표 제출을 요구했다. 이 가운데 재신임 심사에서 살아남은 인사는 박의명 감사(캠코)와 박증환 감사(경남은행)가 전부다. 예금보험공사, 광주은행, 기업은행, 서울보증보험, 우리은행, 증권예탁결제원 등은 새로운 인사로 교체되었다. 예보 등 일부 기관은 여전히 공모를 진행 중이다. 예탁원의 경우는 현재 사장과 감사의 공모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감사는 정부의 재신임 요구에 사실상 응하지 않고 있다. 사표 제출을 거부하면서 버티기에 나선 것이다. 박철용 신보 감사, 남수현 기보 감사, 이태섭 주택금융공사 감사 등이 그들이다.

ⓒ시사저널 임영무

노조 반발로 반년이 지나도록 인선 못하는 경우도

금융위의 나형호 사무관은 “재신임 절차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감사직은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업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태인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은 최근의 민감한 상황을 고려해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임기를 2년여 남겨둔 상황에서 사표를 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정부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사퇴 거부 의사를 명확히 했다.

한 관계자는 “정부에서는 전문성과 낙하산 배제를 원칙으로 내세우고 일괄 사표를 받았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보아라. 사표를 받아놓고도 수개월째 사장이나 감사 자리를 비워놓고 있는데 과연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퇴짜로 CEO를 뽑지 못하고 있는 기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 기관의 관계자는 “솔직히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청와대에서 또 ‘노(No)’라고 했으면 재공모라도 해서 CEO를 뽑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기업은행의 경우 김준호 신임 감사 선임을 놓고 파행을 겪고 있다. 노조가 20여 일째 김감사의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출신지(경북 구미)와 학력(고려대 졸) 등을 볼 때 명백한 ‘낙하산 인사’라는 것이 노조측의 주장이다. 특히 경쟁 은행 출신(하나은행)을 감사로 임명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노조 관계자들은 반발한다.

기업은행 노조는 현재 김감사 선임과 관련해 행정 소송도 제기할 방침이다. 정성훈 기은노조 사무국장은 “현재 금융위에 감사 선임 과정과 기준, 원칙 등에 대한 자료 공개를 요청해 놓았다. 정보 공개에 응하지 않으면 행정 심판을 제기하겠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전 정부에서도 있었던 낙하산 인사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금융 공기업들의 인사 분쟁을 노조의 전형적인 ‘뒷다리 잡기’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는 과거 옳지 않았던 관행을 타파하겠다고 공언했고, 이를 위해 CEO와 감사들에게 일괄 사표를 받았다. 그럼에도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이 지나도록 적지 않은 금융 공기업 경영진에 대한 인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낙하산 논란에 휩싸여 있어 제 발목을 스스로 잡고 있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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