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눈치 보다 ‘백년하청’ 될라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8.07.22 12:0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헌법연구회 출범으로 개헌 정국 본격화…한나라당 일각 “레임덕에 빠진다” 반대 흐름도

ⓒ시사저널 박은숙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초기인 지금, 정국의 주도권을 청와대가 아닌 국회가 움켜잡고 있는 양상이다. 국회가 쥐고 있는 카드는 ‘개헌론’이다. 7월16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국회 ‘미래한국헌법연구회’(헌법연구회) 창립기념식은 대성황이었다.

헌법연구회는 지난 17대 국회에서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과 이낙연 민주당 의원, 이상민 자유선진당 의원이 “향후 18대 국회에서 개헌 논의를 전제로 국회의원 연구 모임을 창립하자”라고 결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 이 모임에는 여야 국회의원 1백67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헌안 발의 정족수인 과반을 훌쩍 넘기는 규모다. 위의 세 의원이 6월10일 창립준비위원회에서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김형오 국회의장과 여야 각 당의 대표들이 모두 참석한 이날 행사는 개헌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주목되는 것은 청와대의 반응이다. 우리 헌정 사상 9차례 이루어진 개헌 가운데,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2공화국 때의 3, 4차 개헌을 제외하고는 모두 청와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의중은 개헌 정국의 절대 가늠자가 된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철저한 무관심으로, 사실상 마땅찮아 하는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정부 출범 초기부터 개헌론을 들고 나오면 이대통령으로서는 임기 초반부터 급격한 레임덕 현상에 빠져들 수도 있다”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날 창립기념식장에서 만난 이주영 의원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워 했다. 그는 “현재의 이 모임은 순수한 국회의원의 연구 모임이다. 따라서 청와대와 사전 교감하거나 협의할 성격이 아니다. 구성원만 보아도 여야 의원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점부터가 그렇다. 순수한 국회 단체에 대해 청와대가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부적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향후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어 국회 내에서 개헌 특별위원회가 구성되는 단계로 나아간다면 사전에 당연히 정부와 협의가 있게 될 것으로 본다”라고 밝혔다.

ⓒ시사저널 박은숙
“순수한 연구 모임, 청와대와 교감 필요 없어”

실제 이명박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 부족에 따른 비난으로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는 현 분위기가 국회의원들을 자극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같은 기류는 18대 국회에 입성한 의원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개헌의 필요성에 강하게 공감하고 있다는 점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18대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개헌에 대한 설문조사를 가장 먼저 실시한 <시사저널>은 지난 6월2일 발매된 제972호 기사 ‘열린다 개헌정국, 원한다 4년 중임’에서 전체 국회의원의 78.4%가 개헌에 공감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후 중앙일보 역시 지난 6월27일 본지와 똑같은 방식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여기서는 개헌에 동의한다는 의견이 81.2%로 조금 더 상승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인한 촛불 정국이 본격화된 이후 최근에는 개헌 공감대가 더 높아졌다. SBS가 7월14일 조사한 결과에서는 전체 의원의 90.3%가 개헌에 대해 찬성한다고 답했고, MBC의 7월16일 조사에서는 92.2%가 개헌에 동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약 한 달여 사이에 “좀더 두고 보자”라며 입장을 유보했던 약 14%의 의원이 개헌 찬성 쪽으로 돌아선 셈이다.

개헌 시기에 대해서는 18대 국회 상반기(2008~2010년) 내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전체 의원 10명당 7명꼴로 엇비슷한 수치를 나타냈다. 각각 <시사저널> 71.2%, <중앙일보> 69.6%, MBC 69%였다.}

이의원을 비롯해 이날 행사장에 참석한 여야 정치인들은 향후 개헌 정국의 시나리오를 낙관적으로 보는 듯했지만 사실상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도 많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 교수는 “개헌 정국이 가열될수록 청와대의 리더십은 약화되는데 과연 이명박 정부가 현재의 난국 상황에서 그것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또한 ‘친 이명박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한나라당의 의석 분포에서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의 의중을 거슬러가면서까지 개헌을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더군다나 이명박 정부 체제에서 향후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의 19대 총선까지 치르게 된다는 점도 국회의원들의 자유로운 행보를 어렵게 하리라는 전망이다.

실제 한나라당의 지도부에서도 조금씩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날 행사장에 참석해 축사를 했던 김형오 국회의장과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개헌의 필요성을 한껏 강조하는 듯했다. 하지만 김의장은 이튿날 제헌절 기념식에서 “개헌과 헌법 연구는 구분되어야 한다. 개헌을 위해서는 긴 토론과 국민적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라며 다소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박대표 역시 “개헌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올해 개헌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한다”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당내에서 이처럼 ‘속도조절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현재 개헌 정국을 바라보는 청와대의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이 등장한다. 심지어는 ‘봉하마을’을 의식하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개헌 정국이 본격화되면 봉하마을에도 상당한 시선이 쏠릴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부터 자신의 임기 중 개헌을 실현하기 위해 상당한 연구를 해왔고, 그에 따른 자료도 축적되어 있다는 전언이다.

주변의 우려만큼이나 헌법연구회가 내부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개헌 정국 시나리오의 발걸음은 더 빨라지는 모습이다. 이런저런 정치적 고려를 다 감안하면 영원히 개헌은 어렵다는 위기 의식도 깔려 있다. 이주영 의원은 “내년 상반기까지는 모든 논의가 마무리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 이후로 넘어가면 2009년 가을의 정기국회와 2010년 지방선거가 이어지면서 사실상 개헌 논의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헌법연구회는현재 이를 위한 3단계 과정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1단계가 올 연말까지의 활발한 연구 및 논의 과정이다. 이낙연 민주당 의원은 “우리 연구회는 내년 초 개헌 특위 구성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개헌에 대한 모든 자료의 풀(pool)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2단계는 내년 상반기에 여야 합의로 개헌특위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약 6개월간 학계 및 시민단체의 모든 여론을 수렴해서 개헌안을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3단계로 이 개헌안을 놓고 내년 7월 국민투표에 붙인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향후 정국은 1년간 개헌 논의로 숨 가쁜 레이스를 치달을 것으로 예상된다.

역대 국회 단체 사상 여야를 동시에 아우르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헌법연구회의 출범으로 개헌 정국이 본궤도에 진입한 것만은 분명하다. 학계에서도 어느 때보다 뜨거운 관심과 지지를 보이고 있다. 한국헌법학회 신평 회장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학계에서도 이제 적극적으로 나설 때다”라고 강조했다.

정치컨설팅업체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여론이 개헌 필요성을 상당 부분 뒷받침해주고 학계와 시민단체 등에서 공감대가 확산된다면 이명박 정부로서도 이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헌 6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의 국회가 환갑을 맞아서 모처럼 입법 기구로서의 제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 좀더 지켜볼 일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