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높이 못 맞추는 어린이 성폭력 판결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 승인 2008.03.3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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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대상 범죄와 같은 형량 적용…“성범죄 해결 의지 약하다” 반발

 

지난해 3월, 김 아무개씨는 자고 있는 의붓딸(11)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딸의 엉덩이를,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만졌다. 딸은 울음을 터뜨렸고 아내는 김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김씨의 행위는 성추행 행위로 인정되어 1심에서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서울 고등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장은 의붓딸을 10년 동안 친딸처럼 키웠고 딸의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행의 의도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딸 성추행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2차 성징 여부가 성추행의 판단 여부가 될 수있느냐”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판결을 내린 송 아무개 판사는 전국성폭력상담소 시설 협의회가 선정한 ‘2007년 여성인권 보장의 걸림돌’로 선정되었다.
경찰청의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전체 성폭력 피해 신고 1만5천3백25건 중 13세 미만 어린이 대상 성폭력 사건으로 접수된 피해 신고는 1천81건(7.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의 6백42건과 비교해 크게 증가한 셈이다. 성폭력은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많은 편인데 그런 잠재적인 피해자까지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어린이 성폭력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 가운데 빠지지 않고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가해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이다. 우리 형법은 제305조에서 ‘13세 미만의 어린이와 성적인 접촉을 할 경우 해당 어린이의 동의 여부와 관계 없이 무조건 강간이나 강제추행으로 처벌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성폭력 범죄의 법정 형량은 강간죄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강제추행죄가 10년 이하의 유기징역 혹은 1천5백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법정 형량 자체가 약하다는 의견이 많다. 표창원 경찰대교수는 “우리 형법은 어린이 성폭력을 성인 대상 성폭력과 같은 법정 형량을 적용해 처벌하며 성폭력 범죄의 형량 자체도 약한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어린이 성폭력 사건에서는 대부분 강제 추행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강간과 강제추행은 성기 결합의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따라서 대부분 신체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어린이 성폭력의 경우 강간죄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성기 삽입만을 강간으로 보는 것은 성폭력 범죄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특히 어린이의 경우에는 항문 성교나 구강 성교 등의 행위도 성기 결합에 준해서처벌해야 한다고”라고 말했다.

“집행유예 등 ‘솜방망이’ 선고받고 거리 활보하는 성범죄자 많다”

 

통계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보건복지가족부 청소년 부문(전 청소년위원회)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4년 7월 6차 어린이·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신상 공개 대상자부터 13차 대상자까지 총 9천31건의 법원판결에서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전체의 20.7%(1869건)에 불과했다. 벌금형을 받은 경우가 40%(3616건), 집행유예가 39.2%(3539건)로 약80%의 성범죄자는 자유롭게 풀려난 셈이다. 비록 최근 들어 법원이 어린이 대상 범죄에 중형을 선고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최근 4년간의 통계를 보았을 때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어린이·청소년 성범죄 근절을 위한 시민사회네트 워크’의 양해경 대표는 “국가가 성범죄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 단체는 지난해 4월 “13세 미만 어린이 대상 성범죄자에게 선고유예 및 집행유예 판결을 하지 말아달라”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없었다. 한국 어린이 성폭력 피해가족 모임의 송기운 대표는 “재판은 아예 의미가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송대표는 “판·검사를 잘 만나야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어린이 성폭력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사람들이 재판을 하는데 제대로 된 판결이 나올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어린이 성범죄자들은 같은 범행을 다시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1천14건의 성폭력 범죄 기록과 6백58명의 동종 범죄 수형자 설문조사를 근거로 지난 2월17일 발간한 ‘성폭력 범죄의 유형과 재범 억제 방안’ 보고서를 보면 성폭력 범죄의 재범률은 지난 10년간 50%대를 유지해 다른 종류의 범죄보다 10%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례로 2006년 2월에 서울 용산에서 있었던 초등학생 살해 사건 역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나온 전과 9범의 성범죄자가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표창원 교수는 “수많은 어린이 및 청소년 대상 성폭행범이 불기소 혹은 기소유예 처분, 집행유예 등 솜방망이 선고를 받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국제적 추세와 비교해도 우리의 형량은 턱없이 적다. 스위스에서는 2004년 어린이 성폭행범에게 무조건 종신형을 선고하는 법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어 입법화되었다. ‘아이들의 천국’이라는 미국도 어린이 성범죄자에게 냉혹하다. 미국 캔자스 주는 재범 가능성이 높은 성범죄 전과자에 대해 형기 만료 후 재범가능성이 사라질 때까지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킬 수 있게 하는 ‘섹슈얼 프레데터 법’을 통과시켰다. ‘이중 처벌’이라는 위헌 논란이 있었지만 1997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5 대 4로 합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이후 애리조나·캘리포니아·미네소타·워싱턴 등 여러 주에서 유사한 법이 만들어졌다. ‘제시카 런스포드 법’도 어린이 성범죄에 대처하는 미국의 자세를 보여준다. 2005년 4월23일, 미국 플로리다 주 의회는 어린이 성폭행 전과자에 의해 살해된 아홉 살 소녀의 이름을 붙인 ‘제시카 런스포드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르면 어린이 성폭행범은 최소 형량이 25년이며 출소 후에도 평생 전자 팔찌를 채워 집중 감시를 받게 된다. 상습 성범죄자에게도 같은 규정을 적용하고 성범죄자를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사람 역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마크 게이도 씨의 지적처럼 어린이 성범죄자의 대다수는 체포된 후 여죄를 추궁해보면 최소 수십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성폭력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어린이 성폭력의 피해자는 그 상처가 성장하면서 평생에 걸쳐 지속되고 그로 인해 인생이 변하는 경우도 생긴다. 따라서 더욱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많다. 다른 국가들이 형량을 강화하고 위헌 논란에도 불구하고 형 집행이 끝난 뒤에 지속적으로 감시의 눈길을 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부모모임의 송대표는 “애들이 수십명, 수백명이 죽어야 윗사람들이 제대로 방지책을 만들어줄 것인가”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지난 3월26일 김경한 법무부장관은 “어린이 납치·성폭력 사건에 대해 초동 단계부터 전담 검사를 지정하고 사형·무기징역 등 법정 최고형으로 엄벌하겠다”라고 밝혔다. 또한 그동안 이중 처벌 논란으로 표류하고 있던 상습 성범죄자의 ‘치료 감호 제도’를 도입해 어린이·청소년 대상 성폭력 범죄의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늦은 감이 있는 발표이지만, 약속보다는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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