꾹 참으면 ‘화병’ 욱하면 ‘범죄’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8.02.2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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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등 유발하는 충동조절장애, 어떻게 이겨내나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다. 최근 세 차례 불을 질렀다. 처음에는 아는 형에게 꾸지람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독서실 한구석에 있는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질렀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불을 지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난다. 이후 집에 있는 쓰레기 더미에도 두 차례 불을 질렀다. 이때는 시너까지 뿌렸다. 소방차가 출동하고 불을 끄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과에 접수된 상담 사례 중 하나이다. 최근 이런 사례와 같거나 유사한 정신 상담·진료가 늘어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정신·행동 장애로 진료를 받은 환자는 2001년 1백34만명에서 2006년 1백80만명으로 5년 사이에 35% 늘어났다.

 
정신 또는 행동 장애자들이 이렇게 늘어나면서 생겨나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무분별한 행위가 자신은 물론 가족과 이웃, 사회에 피해를 끼치며 극단적인 반사회적 범죄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점이다. 이번 숭례문 방화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지난해 4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 한국계 이민 1.5세대의 무차별 총기 난사나,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등 개인적인 동기를 충족시키지 못하자 홧김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들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도박·가정 폭력 등 여러 형태로 드러나

의학계에서는 이를 ‘충동조절장애’로 보고 있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임세원 교수는 “홧김에 어떻게 했다는 것은 충동조절의 문제이다. 충동조절장애라는 병이 따로 있다. 이는 도박·방화·쇼핑·가정 폭력 등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심지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는 경우도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충동조절장애를 겪는 사람은 적지 않다. 문제는 화의 표출이 반복적이거나 그 강도가 세지는 것이다. 도박의 경우 작게 시작해서 점점 커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했다.
충동조절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경희의료원 정신과 이서경 교수는 “그 원인은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일반적인 경우를 들면, 충동조절기관인 두뇌의 전두엽이 손상되면 참는 능력이 미숙해진다. 폭음이나 사고 등으로 전두엽이 손상되는데, 도파민 등 신경전달물질에도 이상이 생긴다. 또 아동기의 좋지 않은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가정 폭력·알코올 중독·성 문란·반사회적 경향을 보이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충동조절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청소년기에 비행을 일으키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를 모두 정신질환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 의료계의 견해이다. 화를 발산하지 않고 참고 삭이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병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불을 잘못 처리해서 생기는 개인적인 현상으로, 화를 참고 마음속에 쌓아두다 생기는 화병(火病) 정도로 넘기는 것이 상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인간 관계를 중시하며 상하 관계를 예민하게 따지다 보니 다른 사람이 없거나 익명이 보장되는 곳에서 일시적인 충동조절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유태우 교수는 “우리는 화를 참는 문화에 익숙하다. 화를 참고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것이다. 홧김에 어떤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대부분 충동적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폭발한 후에는 그 화가 쉽게 가라앉는다. 이 점이 서양 사람들과 다르다. 서양에서는 화가 계획적인 범행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화는 사회적·문화적 소외와 냉대 또는 심리적 열등감이 쌓여 생기는 것인데, 한두 번 욱하는 현상으로 표출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여러 번 지속적으로 반복되거나 분출 정도가 심해지면 돌이킬 수 없이 몰상식한 범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홍진표 교수는 “충동조절장애에는 매우 다양한 배경과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모두 병적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 겉으로는 정상적이지만 좌절감이나 분노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 벌어지는 일탈 행위이다. 보통 물건을 훔치거나 불을 지르는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행동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 문제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한의학에서는 충동조절장애를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자주 처하는 현대인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지사미한의원 조희철 원장은 “몸속 화를 견디지 못해 병원에 오는 환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화의 시대에는 사회적 분위기가 급하게 돌아간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초조해지고 열등의식을 느끼게 된다. 숭례문 방화범도 토지보상비 문제로 속을 끓이면서 사회 전반에 적대감과 분노를 키웠고, 숭례문 방화를 통해 이를 극단적으로 해소하려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충동조절장애에 대한 해결책은 그 원인만큼이나 다양하다. 경희의료원 이교수는 “뇌손상으로 인한 충동조절장애라면 약물의 도움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뇌에 세로토닌이라는 대사물질을 증가시켜 효과를 보았다는 연구도 보고된 바 있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지나치게 높은 경우에도 공격성과 폭력성이 심해지므로 이런 때는 호르몬을 줄이는 약물 치료가 도움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이웃과 친밀하게 지내며 대화 나누면 큰 도움

장애 현상이 심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서울대 의대 유교수는 “마음의 화를 다스리는 열쇠는 서로 관심을 갖는 인간 관계에 있다. 이웃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의사를 소통하면 대부분의 화는 누그러뜨릴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청소년기에는 교육을 통해 예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울아산병원 홍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감정을 조절하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항상 억압당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한다. 감정을 조절하는 교육이나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주장했다. 감정을 억누르려고만 하지 말고 소통 가능한 수준에서 발산시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한의학에서는 화를 ‘숨’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로 열이 치솟는다면 숨이 몸 아래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사미한의원 조원장은 “화를 대변하는 신체 장기는 신장이다. 화가 쌓이면 중풍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는 것이 좋다. 단전호흡은 좋은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흉부 호흡만 하기 때문에 신선한 산소가 명치 아래까지 내려가지 않는다. 단전호흡을 통해 숨이 배꼽 아래까지 내려가도록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충동조절장애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오장 기능을 강화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조원장에 따르면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양 젖가슴 가운데 부위나 명치 밑을 손으로 자극하거나 침을 놓으면 좋다. 한약을 사용하려면 기를 흩어내고 돌려주는 약물과 위로 치솟는 열기를 꺼주는 약물이 필요한데, 귤껍질·향부자·시호·황련 등이 좋다. 화병이 오래 지속되면 기운과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므로 이때 심장의 기운과 진액을 보충하는 데 용안육·산대추씨 같은 약재들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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