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에 잠긴 반도체 ‘행복 끝 불행 시작’ 인가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 승인 2008.01.0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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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램 가격, 현물 가격 아래로 폭락 관련 업계 ‘줄도산’ 위기설에 세계 경제도 긴장

 
"IT 버블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얼마나 더 떨어질지 예측을 못하겠다.” 세계 경제가 ‘반도체 가격 파동’으로 암운에 싸이고 있다. D램 반도체 가격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면서 관련 업계의 ‘줄도산’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만 가격이 80% 이상 떨어졌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최소 손익분기점으로 잡고 있던 1달러 선도 지난해 12월 들어 무너졌다.
타이완 온라인 반도체 중개 사이트인 ‘디램 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21일 D램 메모리의 고정 거래 가격은 0.88달러였다. 이는 12월 초보다 12%, 2006년 1월 초보다는 무려 85%나 급락한 수치이다.
업계에서는 1달러 선이 처음 붕괴되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우려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IT 거품 현상이 최고조에 달하던 지난 2001년에도 D램 거래 가격은 1달러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심리적 지지선이라고 할 수 있는 1달러 선이 무너지면서 앞으로 얼마나 가격이 더 떨어질지 걱정이다”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지난해 초 D램 반도체 가격은 5.88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계속해서 하락하더니 이달 들어 손익분기점으로 알려진 1달러 선마저 무너졌다. 불과 1년여 만에 가격이 6분의 1토막이 난 셈이다.
고정 거래 가격이 현물 가격 아래로 떨어지자 관련 업계에서는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다. 고정거래 가격이란 D램 반도체 업체들이 PC 제조 업체 등 단골 고객에게 납품하는 가격을 말한다. 그러나 지난해 12월21일 고정 거래 가격이 88센트를 기록해 현물 가격인 92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한마디로 제품을 팔면 팔수록 적자가 쌓이고 있다는 얘기이다. 때문에 관련 업계에서는 반도체 시장이 향후 본격적인 ‘암흑기’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미 시장점유율 4위와 5위 업체인 미국의 마이크론과 독일의 키몬다는 적자에 접어든 상태이다. 우리나라와 함께 반도체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타이완의 파워칩 세미콘덕터, 난야 테크놀로지 등도 최근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파워칩의 경우 지난해 2분기 1천2백39억원, 3분기 1천49억원이라는 연속 적자를 기록하면서 D램 반도체로 촉발된 전세계 경제 위기론에 불을 붙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사상 초유의 반도체 시장 호황이 지속되면서 최근 생산량이 급속히 늘어났다. 최소한 몇 개 회사는 정리가 되어야 사태가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업계 구조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얘기이다.
이같은 상황이 현실화될 경우 전세계 경제에도 적지 않은 타격이 예상되고 있다. 최근의 경제 상황은 ‘백약이 무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안한 상태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신용 경색 우려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최근 잇달아 금리를 인하했지만 효과는 그때뿐이었다. 여기에 더해 중국 정부의 긴축 정책으로 이른바 ‘차이나 프리미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반도체 대란이 현실화되면 뇌관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촉발된 신용 경색 문제는 잠재된 폭탄과도 같다. 언제 어떻게 다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반도체 시장의 문제가 지속될 경우 전세계 경제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지나친 경쟁으로 시장 파이가 비대해진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목소리로 지적하고 있다. 반도체 시장 전문 조사업체인 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D램 반도체 시장 규모는 최근 몇 년간 급속한 성장을 거듭했다. 지난 2005년 2백51억 달러에서 지난해 3백40억 달러 규모로 커졌다. 시장 상황이 최악인 2007년에도 3백48억 달러 규모로 추정되며, 올해에는 3백90억 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은 하락하는 데 반해 공급량은 오히려 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가격 문제는 계속해서 대두될 전망이다.
 

시장 1위 삼성전자도 수익성 악화 불가피

그러나 관련 업계를 애태우는 것은 정작 다른 곳에 있다. 미래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다. D램 반도체 시장은 그동안 5년을 주기로 등락을 반복해왔다. 업계에서는 이같은 주기를 ‘실리콘 사이클’이라고 설명했다. 요컨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95’가 출시된 지난 1995년과 ‘Y2K 밀레니엄 버그’가 예상되었던 지난 2000년 D램 반도체 시장은 최대 호황기를 맞았다가 이듬해 불황에 빠져드는 경기 순환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최근 이같은 순환 모델이 무너졌다. 지난 2005년 반도체 가격 상승으로 호황을 보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이듬해에도 불황으로 전환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2006년에 이어 2007년 초까지 사상 최대의 호황을 계속해왔다. 때문에 전문가들도 현재 시장을 예측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업계의 걱정도 여기서 시작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아무도 시장을 예측하지 못해 대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로서는 가격이 얼마나 더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라고 토로했다.
그나마 시장 1위와 2위를 확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의 경우 적자 상황은 면하고 있다. 삼성전자나 하이닉스는 범용 D램 대신 부가가치가 높은 그래픽 D램, 모바일 D램의 비중을 늘려왔다. 기술적 우위와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이끌어온 셈이다. 따라서 전세계 반도체 업계가 적자에 허덕이던 2007년 2분기와 3분기에도 흑자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시장 가격 자체가 워낙 낮게 형성되어 있다 보니 조만간 ‘적자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SK증권 박정욱 애널리스트는 “최근의 시장 상황과 원가 절감 속도로 볼 때 하이닉스가 2006년 4분기에 적자로 돌아섰을 가능성이 크다. 가격 하락세가 상대적으로 둔한 스페셜리티 D램의 비중을 감안하더라도 27% 수준의 평균 판매 가격 하락이 예상된다”라고 전망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당장 적자로 전환되지는 않겠지만 수익성 악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굿모닝신한증권 김지수 연구원은 “삼성전자는 부가가치가 높은 그래픽 D램의 비중을 늘려왔고 낸드플래시도 수익성이 좋은 제품 위주로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D램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면서 반도체 부문 총괄 이익 규모가 1천5백억원 이상 줄어드는 등 어려움이 예상된다”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더해 해외 경쟁사들이 국내 업체를 상대로 소송 공세를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그동안 타이완, 일본 등의 업체로부터 견제를 받아왔다. 이 과정에서 일부 업체들이 최근 국내 업체들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의 D램 가격 폭락 사태가 삼성전자, 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이 과도하게 공급을 늘리면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향후 가격 하락에 따른 추가 소송 여부에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후발업체들 60나노 전환 성공하면 시장은 더 혼탁해질 것”
이와 관련해 국내 업체들은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시장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이닉스는 그동안 해외 경쟁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술이나 가격 면에서 우위를 보여온 만큼 문제될 것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측도 비슷한 의견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타이완 업체의 경우 지난해 1분기부터 적자가 지속되어왔다. 공급량이 떨어지다 보면 자연히 시장 밸런스가 맞춰지지 않겠느냐”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러나 타이완 업체들이 생산량을 늘릴 경우 또 다시 출혈 경쟁으로 내몰릴 가능성도 있다. JP모건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60나노 D램을 생산하는 곳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이다. 타이완 등 후발업체의 경우 아직 70~80나노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기술 이전 등을 통해 60나노로 전환할 경우 시장은 또다시 불확실한 상황에 빠져들 수 있다고 한다.
업계 전문가들도 “올해 반도체 시황의 핵심 관건은 타이완 등의 업체들이 얼마나 빨리 60나노로 전환을 하느냐에 달렸다. 이들이 60나노 전환에 실패할 경우 2008년 상반기쯤 공급 과잉 현상이 해소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작업이 성공하면 시장은 또다시 혼탁한 양상으로 바뀔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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