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진보의 ‘공통분모 찾기’ 걸음마를 떼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7.12.10 12: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각기 다른 논리를 내세우며 갈등해왔던 보수와 진보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인정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보수·진보로 나뉘어 각기 다른 논리를 내세우며 갈등해왔던 학자들이 공통분모를 찾아나가고 있다. 갈갈이 찢긴 한국 사회를 통합하는 데 학자들이 먼저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학계가 그동안 공통의 관심사를 모아내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데 소홀했다는 자체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센 세계화 물결 속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진보 학계와 일찍부터 선진화 담론을 들고 나왔지만 여전히 보수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보수 학계가 ‘신진보-신보수’라는 새로운 틀을 통해 접근도를 높여가고 있다.
소모적인 대립을 지양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자는 보수·진보 학자들의 이러한 ‘공통분모 찾기’는 이제 걸음마를 뗀 단계이지만 학계에 새바람을 불러오고 있다. 여기에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은 아직은 경제·교육·정부 개혁 등 우리 사회 현안을 논의하는 데 그치고 있으나, 앞으로 상호 침투 과정을 거쳐 역사를 보는 관점과 우리 사회의 발전 방향 등으로 논의를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수와 진보 학계가 서로를 ‘이분법적인 선악 개념이 아닌 상호 보완적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두 축’으로 규정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들을 풀어가기로 한 것은 분명 지금까지보다 진일보한 모습이다.

“이분법과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자”

학계의 진보와 보수 인사들이 무언가 접점을 찾아보자고 모이기 시작한 것은 올 하반기부터이다. 보수 성향인 한국자유총연맹(총재 권정달)이 지난 7월3일 진보 성향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상임의장 정세현)와 공동으로 ‘화합과 상생의 국민통합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참석한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학자 14명은 대한민국의 정체성 문제와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 등을 놓고 첨예하게 맞섰지만 “서로의 간극을 좁혀 남남 갈등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라는 데에 공감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쓸데없는 이분법 또는 흑백논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자유총연맹은 지난 10월17일에는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 남측준비위원회(상임대표 백낙청)와도 토론회를 열었다.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열린 ‘2007 정상 선언과 국민통합 토론회’가 그것이다. 양측 인사들은 NLL의 정의, 북한 핵문제, 남북 경제협력 등 쟁점을 놓고 팽팽히 맞섰지만 화해와 상생 필요성에 뜻을 같이했다. 자유민주연구학회(회장 제성호)도 8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비슷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12월3일에 서울 정동 배재대 학술지원센터에서 열린 ‘2007 대선과 사회정책 대토론회’에서는 보수·진보 인사들이 함께 대선 후보들의 공약을 검증하는 자리를 가졌다.
BBK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발표에 온 국민의 눈이 쏠려 있던 12월5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노동연구원에서 열린 ‘신보수-신진보 차기 정부 국정과제 대토론회’는 이러한 보수와 진보의 새길 찾기가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자리였다. 이날 토론회는 보수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신보수를 상징하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과 신진보를 상징하는 좋은정책포럼(공동대표 임혁백·김형기)을 비롯해 바른사회시민회의(공동대표 박효종), 코리아연구원(운영위원장 박순성), 뉴라이트싱크넷(섭외위원장 조성환), 복지국가소사이어티(공동대표 이래경·이상이·이태수·최병모),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공동대표 강지원·김영래) 등 일곱 개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박세일 이사장은 “보수와 진보 인사들이 함께 모여 토론한 것은 정책 사회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소통이 부족했던 진보와 보수가 같이 모여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한다는 데 의미가 크다. 보수와 진보가 이런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 정책에 있어서 합의를 도출할 수가 있다”라고 토론회의 의미를 설명했다.
신진보를 대표해 환영사를 한 김형기 경북대 교수는 “분배와 복지, 노동을 생각하는 따뜻한 보수와 성장과 안보, 경제를 생각하는 열린 진보 학자들이 국가 장기 발전에 대해 뜻을 같이했다. 담론화의 장을 연 첫출발인데 앞으로 소모적인 대립으로 가지 말자는 데 합의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 공약 검증하는 자리 갖기도

이날 토론회는 경제 개혁, 복지·노사 개혁, 교육 개혁, 대북 통일·외교 안보 정책 개혁, 지역발전 정책 개혁, 정부 개혁으로 나뉘어 다섯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경제 개혁 분야에서 먼저 불꽃이 튀었다. 신보수를 대표해 나온 한양대 나성린 교수는 “기업이 경쟁력이다”라고 주장하며 법인세를 인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극화라는 용어가 선동적이라며 ‘신빈곤층’이라고 불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서울시립대 윤창현 교수는 “금융업은 우리의 미래이자 성장 동력인 만큼 금산분리 원칙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신진보를 대표하는  한성대 김상조 교수는 “산업 자본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태에서 금융이 밑에 가 있는 나라는 없다. 금산분리 원칙은 유지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재벌들의 투자는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문제는 대-중소기업 간에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의 ‘선도적 투자론’보다는 대-중소기업 간 연관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형기 경북대 교수는 “경제 성장과 사회 통합을 위해 대타협 하는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교육 분야도 비슷했다. 신보수 학자들은 “사립학교에 학생 선발권을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반면, 신진보 학자들은 “교육인적자원부를 더 확대해 승격시켜야 한다. 특권층을 재생산하기 위해 절대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체제는 더 이상 정당성을 갖기 힘들다”라고 강조했다.
정부 개혁 분야에서는 공통점이 많았다. 신진보나 신보수 할 것 없이 정부 기능 및 조직을 대부처 체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사한 중복 기능을 통폐합하고 정비·감축하자는 것이다. 공무원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데도 이견이 크지 않았다.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이견을 보였고, 때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참 반갑다”라며 공통점을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참 좋은 자리였다. 이런 자리를 자주 갖자”라는 생각은 너나할 것 없이 똑같았다. 학계가 ‘말싸움’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대안’을 찾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