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희생양인가 희대의 사기꾼인가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07.12.1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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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씨는 지난 11월16일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때로는 카메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등 여유 있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처음 나타났다. 하지만 불과 20일 만에 검찰의 발표대로라면, 그는 ‘플리바게닝’(형량 협상)을 거론하며 자신의 감형을 구걸하는 비굴한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완벽히 대비되는 김씨의 두 얼굴. 과연 어느 얼굴이 진짜일까. 여전히 국민들은 혼돈스러워 하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김씨에 대한 불신감이 뿌리 깊게 각인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고스란히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12월5일 김홍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 읽어내려 간 ‘BBK 의혹’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는 한 마디로 ‘김경준의 1인 사기극’이었다. 옵셔널벤처스(BBK의 후신)의 주가 조작은 모두 김씨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횡령액도 모두 김씨가 챙겼다는 것이다. ‘BBK는 이후보의 소유’라며 근거 자료로 내세웠던 한글계약서는 위조로 밝혀졌고, “다스의 실소유주도 이후보이다”라는 주장 역시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 검찰의 확신에 찬 결론이었다.

김경준씨, 수사 결과 모두 부인하고 나서

검찰의 발표대로라면 김씨는 지난 2000년대 초에는 이후보를 속였고, 이번에는 범여권과 전 국민을 상대로 또 한 번 감쪽같은 연극을 한 그야말로 희대의 사기꾼이 되는 셈이다. 1972년 7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명문대를 졸업하고 촉망받는 교포 1.5세대 금융 전문가로 두각을 나타냈던 김씨. 그런 그의 실체가 고작 두뇌 회전이 뛰어난 천부적인 사기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 부호가 남는다.
“나는 장사꾼이다. 장사꾼은 계산이 맞아야 거래를 한다”라며 수사 도중 대담하게 검찰에 거래를 제안했다는 김씨가 자신에게 불리할 줄 뻔히 알면서도 왜 이 시점에서 스스로 한국 송환을 결심했으며, 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입국한 지 20일도 채 안 되어 결국 자신의 거짓을 스스로 자백했는지 등은 미스터리이다.
일단 김씨는 검찰의 수사 결과를 모두 부인하고 나섰다. 그는 “BBK가 100% 자신의 소유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라고 변호인을 통해 검찰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김씨의 변호인인 오재원 변호사는 12월6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어차피 형사 사건에서 검찰은 한 일방에 불과하다. 향후 진실은 법정에서 검찰과 싸우면서 가리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김씨는 미국인이다. 미국식 사고를 하고 있고 미국의 정서를 갖고 있다. 미국인을 수사하면서 한국의 검찰이 미국의 법적 제도를 무시하고 한국적 정서로만 접근한 데에서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 법조계에서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서울 서초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한 변호사는 “우선 미국은 법적으로 플리바게닝의 권한을 검찰에 부여하고 있다. 피의자가 조사 과정에서 자신의 형량에 대해 먼저 제안을 하는 것이 미국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런 제도 자체가 없는 한국 검찰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불쾌하게 비추어질 수도 있다”라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또 “미국에서는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범죄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법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의 정서상으로는 이미 검찰 기소만으로도 사실상 범죄인 취급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문화적 차이에 김씨가 당황했을 수도 있고, 결국 최종적인 목표는 검찰 조사가 아니라 법정 싸움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김씨가 미국식 정서로 인한 문화적 차이였던 탓인지, 아니면 사기꾼 특유의 능청스러움이었던지는 몰라도 검찰 조사 과정에서 검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후문은 계속 들려오고 있다. 수사 발표 현장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진하게 묻어났다. 당시 자리에 배석했던 검사들은 표현만 자제했을 뿐, 김씨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전형적인 교활한 사기꾼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김홍일 3차장은 이후보의 다른 의혹에 대한 수사 여부에 대한 질문에 ‘김씨의 거짓말이 다 탄로났는데 굳이 다른 수사를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취지의 답변을 하기도 했다. 한 검사는 “김씨는 수시로 말 바꾸기를 한다. 증거 자료를 들이대면 거기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내놓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필 메모 공개에 이어 정치공작설까지…

검찰의 수사 발표 직전 불거져나온 김씨의 자필 메모가 가뜩이나 김씨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는 검찰의 심기를 폭발시켰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김씨는 이 메모에서 ‘검찰이 이명박을 무서워한다. 이후보를 빼주면 형량을 낮춰주겠다고 한다’는 내용을 써서 면회 온 가족에게 전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검찰은 “오히려 협상을 제안한 것은 김씨 자신이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이런 사건에 정신 나간 검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겠나”라고 김씨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김씨측 역시 그런 제안을 한 검사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맞서고 있다. 법조계 주변에서는 “이 또한 문화적 차이에서 진의가 서로 다르게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라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이번 수사를 담당한 특별수사팀은 추가 수사에서 이 메모의 진실을 반드시 밝히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검찰이 지나치게 김씨에 대한 반감과 불신에 사로잡힌 탓에 상대적으로 이후보에 대한 검증에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김씨는 입국하기 전 국내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 검찰이 48시간 이내에 나를 기소하지 못하면 무혐의가 되는 것 아니냐”라며 자신만만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는지에 대한 논란도 정치권의 새로운 쟁점이 되어 있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배후에 김씨의 입국을 기획하고 부추긴 범여권이 자리 잡고 있다”라는 의심을 계속 제기하고 있다. 즉 “한국 송환을 줄곧 반대해오던 김씨가 지난 8월께부터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가겠다며 입장을 180° 바꿨고, 이후 특정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전략적으로 이후보를 공격하는 발언을 하나하나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선 전에 한국에 들어오면 이후보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여권에서 김씨를 회유한 것이 분명하다”라고 공격하고 있다.
때마침 김씨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연방구치소 수감 동료인 한 미국인이 자신의 변호사에게 “김씨가 한국의 정부 고위 인사의 면회를 받고 이후보의 의혹에 대한 증언을 해주는 대가로 죄를 사면 받는 협상을 했다고 들었다”라는 내용이 국민일보의 12월7일자 보도로 공개되면서 정치공작설과 관련한 의혹은 일파만파로 확산되었다.

 
 
통합신당측은 검찰 수사 발표에 이어서 정치공작설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또 다시 궁지에 몰렸다. 지지율에서 이후보에 비해 현격하게 열세를 보이던 여권이 마지막 반전 카드로 BBK 의혹에 ‘올인’하다시피 했던 결과가 뒤늦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미 검찰이 김씨 수사 과정에서 그의 갑작스런 입국 결심 배경까지 조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밝혀지면 정치적으로 엄청난 회오리가 일 것 같아 이번 조서에는 빼놓았다고 하더라. 만약 여권에서 지나치게 검찰을 자극하면 이런 내용이 흘러나갈 수도 있다고 한다”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김홍일 차장은 “공식적인 수사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조사할 필요성이 없었다”라는 것이다.
김씨가 오판을 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즉 한국의 검찰이 어차피 친여권 성향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 검찰이 자신에게 호의적이고 야당 후보에게는 비우호적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섣불리 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검찰 주변에서 “김씨가 미국식 우월적 사고에 빠진 나머지, 한국 검찰 수준을 다소 얕잡아 본 것 같다”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김씨가 알고 있는 진실에 비해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 자료 확보에는 의외로 소홀히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검찰에서는 끊임없이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 자료를 요구했을 것이고,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 김씨가 무리수를 둔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실제로 김씨가 11월16일 입국 이후 곧바로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당초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검찰의 분위기에 상당히 당황해 한 정황은 이미 기자에게도 포착된 바 있다. 미국에 남아 있던 김씨의 가족 및 그 주변 지인들과 끊임없이 접촉을 하던 기자에게 한 지인이 국제전화를 통해 “김씨에게서 한국 검찰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메시지가 들어온 것으로 안다. 김씨 가족들이 이 때문에 지금 매우 염려스러워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때가 11월20일 무렵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불과 4일만이었다. 이후 미국에서 부인 이보라씨가 갑자기 기자회견을 하고 또 모친 김영애씨가 급거 한국으로 들어온 것 또한 이런 김씨의 메시지를 전달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법정에서 돌출 발언 나와 또다시 요동칠 수도

김씨가 당시 미국의 가족에게 보낸 메시지대로라면 김씨는 한국으로 송환된 직후부터 검찰의 조사에 상당히 당황해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당초 기대했던 대로 검찰이 자신에게 우호적일 것이라는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검찰이 의혹의 실체를 상당 부분 파악한 채 자신의 혐의를 구체적으로 추궁하고 나섰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씨의 당시 심경이라면 그는 충분히 자필 메모(그 내용의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를 썼을 가능성이 있고, 검찰에 협상을 제의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김씨는 이제 한국에서의 여러 가지 상황이 결코 자신에게 만만찮게 전개되고 있음을 파악했음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막다른 궁지에 몰리면 또 어떤 돌발 변수를 터뜨릴지도 예측하기가 어렵다. 이번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실 김씨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이다. 자신의 형량을 최대한 낮추고, 자신의 재산을 최대한 지킨 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뿐일 것이다. 그는 한국의 대선 상황을 이용할 생각은 있을망정, 솔직히 누가 대선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김씨를 이용하려 한 것은 한국의 정치권이었다. 김씨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통합신당 내부에서도 뒤늦게 자성론이 나오고 있다. “어차피 김씨 역시 부도덕한 범죄인이었는데, 지나치게 김씨의 말에 의존한 감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진작부터 부도덕한 김씨와 같이 동업을 하고 그런 사기꾼에 당한 이후보의 도덕성과 능력 검증에 더 치중했어야 했다”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제 김씨는 주가 조작과 횡령뿐만 아니라 사문서 위조와 명예훼손의 혐의까지 쓰게 되었다. 김씨의 변호인인 오재원 변호사는 여러 의혹 제기에 대해 “법정에서 말하겠다”라고 밝혔다. 향후 법정이 김씨의 또 다른 돌출 발언으로 다시 한 번 요동칠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자칫 이후보뿐만 아니라 검찰과 심지어는 범여권까지 그의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씨의 두 얼굴이 향후 법정에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여전히 BBK 의혹은 대선과 상관없이 한동안 계속 한국을 혼란 속에 빠트릴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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