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검찰 관계자들은 김씨가 국내 송환되었던 지난 11월16일을 전후해서 “후보 등록 이전에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유권자의 판단을 돕는 것 아니겠느냐”라는 언급을 자주했다. 대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 변수인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후보 등록 이전에 일단락짓는 것이 검찰로서는 정치 공방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 있다고 판단했던 듯싶다. 그래서 김씨가 귀국하기 이전부터 특별수사팀을 꾸려 광범위하게 참고인 사전 조사를 벌였고, 귀국한 김씨를 밤샘 조사했던 것이다.
이면계약서 원본 제출로 수사 급제동
하지만 검찰은 후보 등록 이전에 발표할 만한 ‘알짜배기’ 수사 내용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김경준씨의 부인과 누나, 어머니까지 이번 수사에 직·간접으로 뛰어들면서 검찰의 수사에 급제동이 걸렸다. 김씨의 부인 이보라씨가 지난 11월2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데 이어, 22일 오전에는 김씨의 누나인 에리카 김 변호사가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영문과 한글로 된 4개의 이면계약서 원본을 갖고 있으며 이 중 한글 계약서는 이명박 후보가 BBK의 소유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계약서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검찰에 이면계약서 원본을 제출하겠다고 밝혔고, 이에 검찰 수사도 멈칫했다. 에리카 김 변호사가 인터뷰했던 날 안영욱 서울중앙지검장은 ‘대선 후보 등록일 전에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느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게 잘 되겠는가”라고 말해 후보 등록 이전에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일’임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검찰 안팎에서는 김경준씨의 구속 시한인 12월5일쯤에나 중간 수사 결과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중심이 쏠렸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에리카 김 변호사가 미국에서 동생 김경준씨에게 보낸 10㎏ 상당의 서류를 분석해야 하고, 11월23일 김씨의 어머니 김영애씨가 가져온 이면계약서 원본 등에 대한 진위 검증 작업을 벌여야 하는 시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가뜩이나 갈 길 바쁜 검찰이 또 다른 과제를 새로 떠안게 된 셈이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김경준씨가 국내로 송환되기 전부터 검찰은 ‘BBK 사건’ 내용에 대해 이미 상당 부분 파악하고 있었는데 김씨측이 뒤늦게 새로운 자료를 내놓는 바람에 수사 발표 일정이 뒤로 늦춰졌다”라며 다소 불만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김씨측은 왜 뒤늦게, 그것도 후보 등록일을 임박한 시점에 이면계약서 원본 등 새로운 자료들을 제출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에리카 김 변호사는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서류를 내놓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명박씨와 여러 가지 민사 소송이 있었지만 그 소송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서류를 제출하라는 요청이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검찰 애매모호하게 발표하면 곤경 처할 수도
그렇다면 예상보다 뒤로 늦춰진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는 대선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만약 후보 등록일 이전에 이명박 후보가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판명되어 기소되었다면 한나라당 당헌 당규에 따라 이후보는 당원권이 정지되어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후보 등록을 마친 상태여서 대선 후보에 대한 기소 등 사법 처리가 어려워진 상황이다. 이에 검찰 안팎에서는 “검찰이 대선 전까지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있다. 이후보를 기소할 수 있는 수준의 결정적 물증이 나오지 않으면 수사 결과를 대선 이후로 연기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향후 검찰이 이후보에 대해 ‘혐의 없음’으로 발표한다면 이회창 후보에게로 일부 쏠렸던 표심이 다시 이후보에게 돌아올 수도 있고, 거기서 더 탄력을 받아 지지율이 급상승할 가능성도 있다. 그야말로 이후보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는 셈이다.
반면 ‘혐의 있음’이나 ‘기소 가능할 정도로 위법 소지가 있음’이라고 발표할 경우 대선 정국은 짙은 안갯속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우선 이후보에게 실망한 일부 보수 지지층이 이회창 후보를 선택할 수도 있는 데다 범여권이 단일 후보를 내세울 경우 현재의 ‘1강(이명박) 2중(이회창·정동영)’ 구도는 ‘3강 구도’로 재편되면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보의 ‘BBK 사건’ 연루 가능성을 애매모호하게 발표할 경우 검찰은 곤경에 처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 이후보 친형 이상은씨의 도곡동 땅 지분에 대해 “제3자의 소유로 보인다”라고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정쩡하게 발표하면 정치권에서 또 다시 반발이 일어나며 검찰의 신뢰성에도 큰 상처를 남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검찰은 실체적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유·불리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국민만을 바라보고 열정을 갖고 공명 정대하게 수사하기 바란다.” 30년 동안의 검사 생활을 마감한 정상명 전 검찰총장이 퇴임 전날(11월22일) 검찰 전자신문인 ‘뉴스프로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는 ‘BBK 사건’과 ‘삼성 비자금 의혹 사건’ 등으로 ‘뜨거운 겨울’을 맞고 있는 검찰 후배들에게 했던 당부인데 ‘국민만을 바라보고’ 검찰이 내놓을 BBK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국민들이 과연 ‘공명 정대하게’ 수사했다고 생각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제 바통은 11월26일 공식 취임한 임채진 신임 검찰총장에게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