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 듣는’ 의사의 진실
  • 조 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7.11.03 19:1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버드 의대 교수가 제안하는 최고의 치료 방식

 
의료 현장을 배경으로 한 메디컬 영화나 드라마들에서 사람들은 잘 포장된 ‘명의’들을 만난다. 그 명의들은 ‘독심술’을 지니기나 한 것처럼 환자의 마음까지 꿰뚫는 대화를 나누는 따뜻한 장면을 연기하기도 한다. ‘병원이 저토록 따뜻할 수 있을까?’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병원을 찾은 사람들 중에는 더러 낭패감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바쁜 줄은 알겠지만 의사에게 ‘푸대접’을 받고 나오는 심정은 너덜해진 걸레 같았다고. 동물병원도 이러지는 않는다며 건성건성 처방을 내리는 거냐고 애먼 사람을 붙들고 따진다.
대개 환자는 의사가 과연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줄까 걱정한다. 의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사가 처방이라는 의사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모르니 의사의 얼굴만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다.

“환자의 도움 없이는, 최선의 결정이란 없다”

<닥터스 씽킹>은 환자에게는 말문을 트게 하고, 의사에게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다. 온갖 오진의 실태를 엮어 의료 현장을 고발하거나 의학의 진실을 파헤쳐 ‘나쁜 의사’들을 경계하는 사례는 각종 매체를 통해 숱하게 보아왔다. 그것보다 의사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똑똑한’ 환자가 되는 법을 일러주는 것은 어떨까. 오진을 막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라고 <닥터스 씽킹>은 생각한 듯하다. 이 책은 순간적인 오진을 막고 진짜 병명을 발견해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의사와 환자가 서로 도와야 한다’라고 말한다.
앤 도지라는 여성은 15년 동안 서른 명의 의사를 만났다. 의사들은 ‘거식증’ ‘폭식증’ ‘과민성 대장증후군’ 등 각자의 판단에 따른 진단과 처방을 내렸다. 하지만 앤의 증상은 악화될 뿐이었다. 식이장애로 체중이 떨어진 상태에서 굶어죽을 수도 있었던 앤을 살려낸 것은 소화기내과 전문의 팔척 박사였다. 팔척 박사도 앤을 건성으로 진찰하고 다른 의사들처럼 ‘적절한 식이요법과 신경안정제 치료를 받으면 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는 대신 묻고, 듣고, 관찰한 뒤,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어이없게도 앤의 소장이 뒤틀린 것을 밝혀낸다. 뒤틀린 소장을 바로잡기만 하면 될 것을 정신적 질환까지 결론을 내리는 오진들이 잇따랐던 것이다.
여기서 앤을 살려낸 것이 ‘바쁜’ 팔척 박사가 모처럼 베푼 ‘따뜻한’인술 덕분이었을까. 아니다. 팔척 박사가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앤을 구하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앤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앤이 팔척 박사의 질문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않고, 팔척 박사의 정밀 검사 제안을 뿌리쳤다면 또 한 번 오진을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닥터스 씽킹>은 앤 도지의 사례를 필두로, 평소 술을 즐긴다는 환자를 알코올 중독자로 오인해 정밀 검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가 그것이 희귀병의 전조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토론토 대학 레델마이어 교수, 남루한 차림의 청년에 거부감이 생겨 무관심하게 지나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뇨성 혼수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린 내분비학 전문의 델가도 박사,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CT 촬영 결과에서 발견해내지 못한 징후를 결국 심근경색이 발병하고 나서야 파악한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응급의 크로스케리 박사 등 갖가지 오진의 유형들을 들어 의사들의 진단 과정에 ‘메스’를 들이댄다.
저자는 고해상도 MRI 스캔, DNA 분석과 같은 눈부신 기술들이 아무리 현대 의학을 보좌한다고 해도 임상 의학의 기반은 여전히 ‘언어’임을 강조한다. 환자와 소통하면서 의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단서와 암시를 환자 자신의 이야기에서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은 자신이 빈틈 없는 의사라고 자부하며 위험한 직관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의심하지 않고 오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의사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한 명의 환자를 면밀하게 분석하기는커녕 더 많은 환자를 받아 ‘남는 장사’ 하기 바쁜 의료계 현실도 잊지 않고 챙긴다.
환자가 증상을 얘기하는 중에 계속 말을 자르는 의사는 십중팔구 자신에게 편리한 진단과 치료법을 앞세운다. ‘좋아할’ 만한 환자가 아닌 이상 오판이어도 좋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저자는 “오진은 의사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창이다. 이는 왜 의사들이 자신들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지, 때때로 폐쇄적이고 왜곡된 사고를 하는지, 지식의 틈을 보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드러낸다. 오진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최근 대부분의 의료 과실이 기술적 실수가 아니라 의사의 사고적 결함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밝힌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의사를 또 찾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의사를 찾아볼 것인가. 의사에게 만일 당신이 환자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물론 다른 의사를 찾겠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