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경영 없으면 기업도 없다
  • 왕성상 전문기자 ()
  • 승인 2007.10.2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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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SO26000 가입으로 사회적 책임 무거워져…기업의 국제적 위상 높일 계기

 
요즘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는 ‘신정아-변양균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평소 윤리 경영을 강조해왔던 김총재가 후원금 문제로 말썽을 빚자 매우 난처해진 것이다. 윤리 경영 실천을 위한 준법윤리실을 신설하고 사회 공헌 활동에 발 벗고 나섰지만 이 문제로 애쓴 흔적들이 물거품으로 변해버렸다. 변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부산고 동기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할 말을 잃은 분위기이다. 대우건설 사장 시절 변 전 실장의 전화를 받고 성곡미술관에 거액을 후원한 박세흠 대한주택공사 사장을 비롯한 다른 몇몇 기업인들도 처지는 마찬가지이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풀려나면서 여론의 도마에 올라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재계에 비상이 걸렸다. 기업 윤리와 윤리 경영 도입이 절박하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재계에 ‘윤리 경영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이다. 윤리 경영 자율진단 지표 개발, 윤리 경영 인증 제도 도입, 직무 윤리 실천 결의대회, 전담 부서 설치 등 여러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다. 경제 단체는 물론 대기업,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윤리 경영 실천에 속도가 붙었다. 또 공기업의 청렴도 측정과 주요 그룹들의 감사·감찰도 강화되고 있다. 심지어는 대학에서 연구 윤리 지침까지 만들어 시행할 정도이다.
재계가 윤리 경영에 끈을 바짝 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윤리 경영을 하지 않고서는 치열한 기업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특히 2009년부터 기업 윤리 측정 잣대인 ISO26000(사회 책임에 관한 국제 표준 규정)을 적용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국제 거래가 불가능한 점도 작용하고 있다. 윤리 경영이 기업 생존의 필수 사항으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는 제품의 질이 좋고 가격 경쟁력만 있으면 수출도 할 수 있고 국제 사회에서 큰 문제 없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2년 뒤부터는 그렇지 않다. ISO26000이 기업의 목줄을 죄일 만큼 영향을 미친다. ISO(국제표준화기구)가 2009년 11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표준’을 발표할 예정이어서 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ISO, 2009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표준 발표할 예정

재계의 윤리 경영 바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지표 개발과 업무 협약 체결.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최근 윤리 경영 자율진단 지표를 발표했다. 적용 대상은 윤리 경영 제도 및 시스템, 고객, 종업원, 주주 및 투자자, 경쟁 업체, 협력 업체 및 사업 파트너, 지역 및 국제 사회 등 7개 부문이다. 윤리 경영 수준과 개선점 파악은 물론 기업 수준에 맞는 윤리 경영 추진 방향을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인 셈이다. 정부가 학계에 맡겨 펴낸 이론적 지표와 달리 기업 현장을 바탕으로 한 점이 특이하다. 전경련은 이에 앞서 10월11일 전경련 회관에서 2007년 제3차 기업윤리학교를 열고 윤리 경영 실천 사항들도 논의했다. 
벤처기업협회는 10월12일 윤리 경영 교육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기업의 투명 경영, 윤리 경영을 위해 기술보증기금, 중소기업진흥공단, 벤처캐피탈협회와 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협회는 또 벤처 윤리 경영 인증제도 시행 중이다. 인증 평가 참여 기업에 대해 평가 비용 중 50%를 지원한다. 올해 목표는 선착순 20곳. 또 평가 결과 윤리 경영 인증을 받는 벤처 기업에는 코스닥 상장법인 협의회, 은행연합회, 한국표준협회 등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시상과 포장·훈장 심사 때도 가점이 주어진다.
윤리 경영 바람은 학계로까지 건너가 ‘황우석 사건’으로 이미지를 흐린 대학들도 이를 접목시켜가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고려대로 지난 9월 초 ‘연구 윤리 지침’을 마련했다. 논문 표절과 중복 게재 같은 연구 부정 행위를 막기 위해서이다.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중앙대 등 다른 대학과 연구 기관에서도 비슷한 제도 도입을 추진하거나 검토 중이다. 
부쩍 느는 기업들의 윤리 경영 선포식도 눈길을 끈다. 소비자와 밀착해 있는 식품·금융·유통 회사들이 적극적이다. 샘표는 9월1일 윤리 경영 기업 문화 선포식을 가졌다. 60년 ‘신뢰 가치’를 바탕으로 윤리 경영을 통한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윤리경영위원회’를 통한 사원 교육은 물론 실무에 적용시킬 수 있는 ‘샘표 윤리경영서’도 펴냈다. 윤리경영서는 임직원, 거래처, 협력사에 배포되었다.
SK증권도 지난 9월8일 임직원 대상의 직무 윤리 실천 결의대회를 열었다. 구호성 윤리 경영에서 벗어나 일 중심, 개인 중심, 가치 중심의 실천력을 확보하자는 취지이다. 고객, 주주, 사회, 사내 직원들 간의 윤리적 업무 수행 지침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 학계도 연구 윤리 지침 마련

해태제과, 풀무원, 신세계, 국민은행, 하나은행, 삼성화재, 동부화재도 윤리 사무국을 운영하며 깨끗한 회사 만들기에 힘쓰고 있다. 한국전력공사, 한국지역난방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석유공사, 한국전기안전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공사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주요 그룹들 사이에 사회 공헌 활동과 깨끗한 조직 문화를 통한 윤리 경영 이미지 높이기에 나서는 사례도 줄을 잇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현대·기아차그룹. 이 그룹은 9월17일 사회공헌기금을 운용할 ‘사회공헌위원회’ 인선을 마무리하고 10월22일 공식 출범한다. 위원회에는 이희범 무역협회장, 어윤대 한국국제경영학회 고문,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 손지열 전 대법원 대법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이사장(변호사), 유홍종 현대·기아차그룹 사회봉사단장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사회 공헌 업무를 총괄하며 구체적 사업 목표를 정해 올해 구체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위원회 사무국은 서울 계동 사옥에 3백30㎡ 규모로 마련되며 곧 현판식도 갖는다.
2005년 삼성 경영 원칙을 발표한 삼성그룹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법과 윤리 준수 △깨끗한 조직 문화 △고객 존중 △주주 존중 △종업원 존중 등 5대 원칙과 15개 세부 원칙, 42개 행동 세칙을 정해 시행에 들어갔다. 삼성의 ‘일등주의’에 일고 있는 사회의 ‘반(反) 삼성 기류’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이 원칙들을 지켜간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계열사인 삼성증권은 지난해 7월 증권업계로서는 처음으로 공정 거래 자율 준수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또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뽑아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 운영하고 있고, 감사위원회 위원장 역시 사외이사가 맡았다.
LG그룹 또한 윤리 경영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분야별로 전문화된 5개(복지·문화·교육·환경·언론) 공익 재단을 통해 윤리 경영을 그룹 차원에서 펼친다는 전략이다. 또 계열사별로는 △여성·아동 복지 △소외 계층 지원 △청소년·과학· 교육 지원에 중점을 둔 사회 공헌 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사회 공헌 기금 조성, 국제적 환경 규제 대응도 그 내용 속에 들어 있다. LG그룹은 협력사와의 공정 거래 관행 정착을 위한 불공정 거래 신고 센터와 구본무 회장 취임을 계기로 내세우고 있는 ‘정도 경영’을 윤리 경영에 연결시키고 있다. 
올해 7월 지주사 체제로 돌린 SK그룹은 ‘행복 추구’를 모토로 윤리 경영을 확산시켜가고 있다. 투명한 지배 구조를 통해 사회와 그룹 발전을 꾀한다는 것이다. SK텔레콤의 경우 윤리에 바탕을 둔 사회적 책임 경영에 주력하고 있다. 윤리 경영이 결국에는 기업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생산성 향상, 재무 구조 개선을 가져온다는 시각에서이다.
포스코 역시 윤리 경영 실천에 앞장서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전담 부서를 두고 신입 사원에서부터 최고 경영자에 이르기까지 실천 항목을 만들어 시행 중이다. 포스코는 최근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업 윤리 기구인 ECOA(세계 윤리경영 전문가 협회) 연차 총회에 초청받아 윤리 실천 활동 사례도 공개했다. 미국에서 열린 총회에서 포스코는 선물 반송센터 운영, 차별화된 직원 윤리 교육 콘텐츠 등을 설명해 각국 기업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재계의 또 다른 화두, 대기업 - 중소기업 상생

윤리 경영과 관련된 재계의 또 다른 화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시장 개방 추세에 살아남는 지름길로 새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기업윤리경영연구원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위한 공동 윤리 경영 해법 찾기에 나서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산하 비영리 법인체인 이 연구원은 전경련, 대한상의에 업종별 윤리 경영 실천 프로그램과 윤리 경영 표준 매뉴얼을 만들어주었다. 또 내부 고발 장치인 헬프 라인(HELP LINE)도 특허 출원해놓고 있다. 이어 오는 10월25일 ‘대·중소기업이 함께하는 윤리 경영’ 세미나와 10월29~30일 대기업 및 추천 협력사 윤리 경영 실무 책임자 워크숍을 연다. 참가 기업은 SK텔레콤, 포스코, 포스코건설, 두산중공업, 대우인터내셔널, 한국동서발전, 한국수력원자력발전, 금호건설, 삼양사 등 대기업체와 70여 중소기업체이다. 이번 행사에는 학계·재계 대표들과 정부 당국자들도 함께한다. 또 윤리 경영 분야의 세계적 인물인 일본 려택대학의 다까 이와오(高巖) 교수 등 전문가들의 특강도 잡혀 있다. 남재우 기업윤리경영연구원 상근 부회장은 “기업들의 국제적 비중이 날로 커지는 점을 감안할 때 선진국들이 엄격히 따지는 윤리 경영 항목은 기업 생존에 필수가 되고 있다. 특히 2년 뒤 본격 적용될 ISO26000과 윤리 경영 시스템 도입이 절실하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윤리 경영이 재계에 뿌리 내리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윤리 경영 저변 확산에 필요한 정부 차원의 지원, 사회 공감대 형성, 기업들의 자발적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게다가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프로그램 개발, 전문 인력 및 기관·단체 육성도 절실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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