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워> 논쟁에 드리운 한국 영화의 허상
  • 김종휘(문화평론가) ()
  • 승인 2007.08.2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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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워>를 둘러싼 무더운 논쟁은 아무래도 ‘가상’의 양자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할 모양이다. 이 점입가경의 논쟁을 ‘가상’의 구도에 휩쓸린 ‘허상’으로 보는 이유는 예컨대 찬반 세력이 개봉관 앞에 대치해서 물리적 충돌을 빚어내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논쟁을 인터넷 게시판의 무차별적인 퍼나르기나 감정 표출이 주도하는 댓글 문화의 거품에 불과하다고 보아서만도 아니다. ‘네티즌의 폭발적…’ 운운하거나 ‘오늘 드디어 600만 돌파…’ 하는 식의 경마식 중계를 일삼는 신문·방송의 추수적인 보도 관행 탓만도 아니다.
‘혹독한 비평’이든, ‘애정 어린 비판’이든 <디워>를 옹호하지 않는 모든 입장에 발끈하는 반응들에서 ‘바보’ 심형래와 ‘잘난 척 하는’ 충무로를 선명하게 대비시키고 싶어하는 감정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LA 시내 교통을 전면 통제한 채 대규모 전투 신을 찍었고 미국 1천5백개 영화관 개봉을 선포한 심형래 감독 식의 할리우드 현지 공략’과 ‘할리우드 공세에 맞서 한국 영화를 살리자면 스크린 쿼터를 사수해야 한다고 외쳤던 스타 배우들과 감독들의 알량한 국내용 밥그릇 지키기’를 맞대면시키는 심리 때문이다.
이는 사실에 기초한 것일까? 알다시피 충무로라는 단일한 실체는 없다. 있다면 그것은 가상의 이미지로 설정된 충무로이다. 충무로에는 돈이 넘치는 영화도 있으나 배고픈 영화가 훨씬 더 많다. 거만한 이도 있고 겸손하게 제 한 몫에 충실한 이도 있다. 심감독의 ‘할리우드 공략’도 미국 현지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와 무관한 자화자찬의 가상 이미지일 수 있다. 스크린 쿼터 사수의 대열에는 ‘외제차 타고 다니는’ 한류 스타의 얼굴도 있었지만, ‘라면 먹고’ 사는 스태프나 독립영화인의 비판적 동참의 발걸음도 있었다.
하나 ‘무엇이 사실이냐?’를 묻는 일은 이제 무의미한 것 같다. 대신 이렇게 질문을 바꾸고 싶다. 영화 <디워>에 열광하면서 눈물 흘리는 심형래 감독의 마음에 동조한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그토록 경멸하고 싶은 것일까? 대중의 헌사는 텍스트나 인물의 뛰어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광풍’으로 번지는 경우는 그 지지나 옹호가 무엇에 대한 경멸과 상호 작용할 때이다. 거두절미하면 나는 그것이 ‘1천만 시대를 자랑스러워한 한국 영화의 자기 기만’에 대한 대중의 짜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제까지 지들이 영화 잘 만들었으니까 1천만 관객 들었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사실 다 애국심으로 봐줬으니까 1천만 넘긴 거지,  <디워>만 애국심에 호소한다고?’ ‘오락 아닌 영화도 있나, 작가주의 영화 만든다는 니들은 정말 순결해?’ 하는 기분들. 억측과 오해가 적지 않겠지만, 최소한 영화 <디워>와 심형래 감독의 대척점에 설정된 가상의 충무로나 한국 영화 이미지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스크린 쿼터에 대한 대중의 지지 철회가 1탄이었다면 <디워>를 빌미로 2탄의 ‘규탄’이 쏟아지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한국 영화가 1천만의 싹쓸이 독배 경쟁이 아니라 2백만 영화들의 다섯 번 건배를 선택했다면 지금처럼 <디워> 논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시장 규모에서 1천만명이 보는 영화는 영화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와 <괴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왜 <디워>만 갖고 그러냐고 문제 삼는 이들에게 ‘영화는 영화로서 봐야 한다’고 하면 화만 더 돋우는 일일 것이다. 해서 1천만을 향해 달리는 <디워>는 이제 자신이 아니라 한국 영화의 ‘허상’에 대해 묻는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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