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없이 '묻지마 대출'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6.0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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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 중소기업에 '퍼주기'...전체 금융 시스템 불안 몰고 올 수도
 

안녕하세요? ○○은행입니다.” 이른 아침 출근 시간. 서울 시청역·여의도역·강남역 주변 등지에서는 은행들의 판촉전이 한창이다. 어깨띠를 두른 직원들이 직장인들의 발길을 잡느라 바쁘다. 좋은 자리를 먼저 잡기 위해 은행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도 눈에 띈다.
국민은행 김 아무개 과장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007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선다. 카드 회원을 유치하기 위해 하루에도 서너 번씩 고층 빌딩을 오르내린다. 저녁에는 친목 모임을 챙기는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빠지지 않는다. 그에게 하루 일과가 따로 없는 셈이다.
시중 은행간 ‘쩐(錢)의 전쟁’이 치열하다. 은행들은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간다. 증권·보험·카드 시장에도 은행 자본이 침투했다. 은행권의 자산 불리기 경쟁은 한 치 양보가 없다. 주거래 고객 확보와 금고·지점 입점 등에는 자존심 건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시중 은행들의 최대 승부처는 중소기업 대출 시장. 지난해에는 부동산 가격 폭등이 이어지면서 주택담보대출에 몰렸으나 올해는 중소기업 쏠림 현상이 뚜렷하다.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금융 당국의 제재가 강화되면서 중소기업들이 신규 대출 시장으로 떠오른 것이다.
금융 당국에 따르면 지난해 시중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액은 43조5천억원이 늘어났다. 주택담보대출을 포함한 가계 대출 증가액(약 40조9천억원)보다 많은 규모이다. 4월까지 가계 대출 증가액은 3조8천억원에 그쳤다. 반면 중소기업 대출은 22조2천억원이나 늘어났다.
중소기업 대출이 과열되면서 곳곳에서 부작용들이 나타났다. 경쟁사의 우량 중소기업 빼내기 등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금융계에서는 신용도가 떨어지는 중소기업에 대한 ‘묻지 마’대출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럴 경우 은행의 수익성 저하는 물론 전체 금융 시스템 불안을 불러올 수도 있다. 시중 은행 수익성 악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의 총이익률이 2005년 2.98%에서 지난해에는 2.82%로 떨어졌다. 당국의 대출 규제로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뛰면서 가계 이자 부담이 커졌다. 중소기업 대출이 부실화하면서 은행 연체율이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중소기업 대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은행권은 양도성예금증서(CD) 발행을 늘리기 시작했다. CD 금리가 급등한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때문에 ‘변동식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고객들이 시중 은행의 희생양이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도 은행채 발행을 통한 은행권의 외형 키우기 경쟁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은행들이 자산 경쟁을 위해 은행채나 CD를 대거 발행하면 수익 구조나 리스크 관리, 가계의 금리 부담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며 경계하고 나섰다.
국민·신한·우리·하나·기업은행 등 5개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5월25일 기준(국민·하나는 5월23일 기준)으로 2백22조1백73억원. 4월 말보다 3조6천4백65억원이 늘었다. 은행별 증가액은 신한은행에 이어 국민·우리·기업은행 순이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중소기업 대출이 급증했지만 지난해는 부동산 관련 대출 위주로 불어났다. 올 들어서는 은행 성장 속도보다 대출 증가 폭이 과도하다는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연체율 상승세 반전, 시중 금리 상승, 통화 긴축 가능성 고조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라고 말했다.

 
파격·틈새 상품으로 ‘특화’ 안간힘

중소기업 대출에 대한 금융 당국의 제재 움직임이 일자 시중 은행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신용 대출 영업 확대에 나서고 있다. 신용 대출은 은행들이 꺼리는 분야다. 은행의 리스크로 돌아올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개인 신용 대출은 상품 특화가 어렵다는 고민도 있다. 더욱이 신용 대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은행 간 금리 인하 경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민은행이나 하나은행, 외국계 은행들은 직장인이나 전문직 사람들의 신용 대출 한도를 늘리는 등 신규 대출 프로그램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은행권의 신용카드 영업 경쟁은 2라운드에 들어섰다. 은행계 카드사들의 파격적 상품이 눈에 띈다. 이 중에서 하나은행 상품이 가장 두드러진다. 하나카드는 지난 2월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100원씩 할인해주는 ‘하나 마이웨이 카드’를 내놓았다. 경쟁 카드사들은 ‘역마진에 가까운 상품’이라며 문제 삼았지만 고객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두 달간 20만 계좌가 팔리는 등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금감원이 ‘지나친 교통 할인 혜택 경쟁’을 지적하자 더 이상 발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성곤 하나은행 공보팀 차장은 “기존 상품보다 파격적 상품이 나오니까 경쟁사들이 위기감을 가졌다. 우리는 고객 니즈(수요)를 찾아가는 상품을 개발하고 팔 것이다. 특화 상품을 개발해 틈새 시장을 공략하겠다”라며 파격 상품 개발에 나설 뜻을 비추었다.
최근 우리은행이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기능을 하나로 묶어 시판한 ‘우리V카드’도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이 카드 특징은 한 장의 카드에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기능을 하나로 합친 것. 사전에 약정한 일정액 이하에 대해서는 통장에서 해당액이 바로 인출된다. 그 이상이면 신용카드로 결제된다는 점이다.
국민은행은 지난 1월 이마트와 손잡고 10만원 이상 결제 때 5천원을 할인해주는 이마트KB를 선보였다. 이 카드 역시 다양한 할인 혜택을 노린 틈새 상품이다. 우리은행이 지난해 시판한 우리e카드도 외식 업체 20% 할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특화 상품이다. 우리은행은 올해부터 3년 안에 카드 시장점유율을 10%로 끌어올리기 위해 ‘대표 상품’을 팔 예정이다.
이런 파격 상품 경쟁이 고객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카드사의 부실로 이어질 위험성도 갖고 있다. 금감원도 개별 상품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분위기이다.
은행권의 영업 전선은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은행 계열 금융지주회사들이 증권업에 이어 보험업 강화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은행은 한일생명을 인수한 뒤 ‘KB생명’을, 신한금융지주는 ‘신한생명’과 ‘SH&C생명’을 갖고 있다. 은행권의 보험사 계열 편입은 보험 시장에 대한 적극적 공략을 의미한다. 올 들어 은행의 성장 통로가 막히자 종합금융 체계 구축이 더욱 절실해진 것도 원인이다.
내년 4월로 예정된 ‘4단계 방카슈랑스’가 시행되면 은행에서 자동차보험·종신보험 등 모든 보험 상품 판매가 가능해진다. 김승만 은행연합회 홍보부장은 “방카슈랑스는 은행과 보험의 시장 개방을 통해 윈윈 하자는 것이다. 은행에서 보험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중·소 보험사들의 판매망이 넓어졌고 수익도 늘었다. 고객은 은행의 안전한 결제 시스템을 이용함으로써 한층 편리해졌다”라고 말했다.
반면 보험사들은 은행에서 다양한 보험 상품을 팔 경우 고객 불만과 피해가 우려된다며 반대하는 입장이다. 보험 시장에서도 은행들의 치열한 영업 전쟁이 예고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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