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부터 세계인이 되려고 준비했다"
  • 김세원(언론인) ()
  • 승인 2007.03.19 09: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 패션계에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 디자이너, 주한 외교 사절들이 가장 아끼는 최고의 민간 외교관, 패션에서 출발해 건축·가전 제품으로까지 브랜드를 확장한 브랜드 마케팅의 성공 신화,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한’ 독특한 말투와 차별화된 외모로 대중 문화의 아이콘이 된 남자. 앙드레 김이 패션 인생 45년을 맞았다.
서울 소공동의 양장점 ‘GQ’에 세를 내 여성 양장점 ‘살롱 앙드레’를 개업한 1962년부터 지금까지 45년 동안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걸어오면서 앙드레 김은 시류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켜왔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1백70여 차례 패션쇼를 열었으면서도 1990년대 후반까지 자신의 건물을 소유한 적이 없었다. 국내외 문화예술계 스타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훈장까지 받았으면서도 해외에 자신의 매장을 세우거나 의상을 수출한 적도 없었다. 그가 사업적으로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앙드레 김의 브랜드 가치를 알아본 기업들이 그를 모셔 가려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2000년부터였다.
앙드레 김을 만나러 서울 신사동에 있는 그의 부티크를 찾아가던 날, 공교롭게도 눈이 내렸다. 동화 속 ‘눈의 여왕’ 궁전처럼 그의 부티크는 온통 하얗거나 투명했다. 1분에 한 번꼴로 울려대는 투명 전화기, 크리스털 조명등, 모델같이 늘씬하고 아름다운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앙드레 김은 일흔두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의욕적이고 힘이 넘쳤다. 소매가 긴 순백의 의상에 가려진 손등의 검버섯만이 그의 생물학적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남자는 부엌에도 들어가면 안 되는 시절에 어떻게 이름조차 생소한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되었나?


내 고향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현 서울시 은평구 구파발동)다. 북한산 너머 멀리 한강이 흘렀다. 진관사라는 절이 있었고 바위와 솔숲이 어우러진 풍광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주 어릴 때, 학교 들어가기 전 의상에 대한 충격적 경험이 있다. 여섯 살 전후니까 아마 1941년이나 1942년이었을 텐데 우리 동네에서 전통 혼례식이 열렸다. 컬러풀한 족두리며 활옷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의상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신도공립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모든 예술 분야를 좋아했다. 그림, 독창과 합창, 연극, 독서도 좋아했다. 저학년 때는 동네 풍경을 그리는 걸 좋아하다가 3, 4학년 되면서부터는 옷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난 누나와 여동생을 모델로 예쁜 옷을 입은 여인을 그렸다. 1961년 국내 최초로 서울 명동에 인터내셔널 디자인스쿨(국제복장학원)이 생겼을 때 주저 없이 1기생으로 들어가 1년 과정을 졸업했다.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했나?


 
인터내셔널디자인스쿨에 다닐 때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하게 됐다. 한 프랑스 외교관이 내가 세계적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을 알고 프랑스 패션 잡지를 보내주고 그랬다. 그분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부르기 쉽고 빨리 기억될 수 있는 이름을 가져야 한다면서 ‘앙드레’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하지만 성까지 버릴 수는 없어서 앙드레 뒤에 성을 붙였다(그의 본명은 김봉남이다). 1년 뒤 양장점을 개업했을 때 처음에는 ‘살롱 앙드레’로 이름을 붙였다가 ‘앙드레 김’으로 바꾸었다.  

앙드레 김은 데뷔 당시부터 패션계의 이단아였다. 여성 일색인 패션계가 남성, 그것도 일반적인 한국인과는 매우 차별화된 외모와 사고방식을 가진 독신 남성을 환영할 리 없었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에 출연했을 때 한국인이 아닌 프랑스 종군기자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이국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보다 몇 발짝 앞서 추진한 국제화와 스타 마케팅 덕분이었다. 그는 1964년 당시 톱스타였던 신성일-엄앵란 커플의 결혼식 때 엄씨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것을 시작으로 김지미·문희·윤정희 등 은막 스타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1966년 파리와 워싱턴, 1968년에는 뉴욕에서 패션쇼를 개최하는 등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려 패션 본고장으로부터 쏟아진 찬사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높였다.
40여 년 동안 당대의 톱스타를 모델로 출연시키고 파리·뉴욕·시드니·홍콩·싱가포르·베이징·앙코르와트 같은 해외 유명 도시에서 패션쇼를 개최한다는 것은 그가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디자이너임을 간접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단골 심사도 그의 권위를 높이는 데 한몫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이 세계적 패션 감각과 톱스타 취향의 소유자임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문화가 국가와 사회에 종속당하던 시절, 앙드레 김은 해외 패션계와 한국 패션계, 화려한 연예계와 일반 대중을 연결하는 다리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화에 눈을 뜬 계기는 무엇인가?


중학교 1학년 때 광복이 되었는데 세계 역사와 지리를 배우면서 세계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영어 과목을 가장 좋아했다. 그 다음이 역사와 지리였는데 세계 지리가 너무 좋았다.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 이런 식으로 100여 개 나라의 수도를 모두 암기했다. 우리나라는 지도상으로 작은 나라고 슬프게도 분단된 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때부터 세계인이 되어야지 하는 굉장히 강한 신념을 가졌다. 

 
인기와 명성을 유지하면서 브랜드 확장을 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세계 모든 디자이너들의 꿈은 의상으로 시작해 다양한 영역으로 작업을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2001년 앙드레김 코스메틱을 시작으로 골프 웨어, 키즈(아동복), 아이 웨어(선글라스), 이너 웨어(속옷), 홈(침장) 등으로 계속 넓혀나갔다. 앙드레김 주얼리도 준비 중이다. 삼성과 손잡고 아파트 인테리어와 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가전제품 디자인을 하고 있으며 신용카드(국민카드) 디자인도 맡았다. 최근에는 조명도 계약해 가을쯤 론칭한다. 샤넬·디오르·지방시·이브생로랑이나 돌체&가바나도 화장품이나 향수 정도만 있지 다양한 전개는 하지 못하고 있다. 뉴욕의 폴로가 유일하게 퍼니처를 하지만 가전제품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 영광스럽고 감사하다. 스스로 평가하기 쑥쓰럽지만 비결을 굳이 말하라면 다양한 문화를 굉장히 소중히 생각하고 좋아하는 덕분이 아닐까 싶다. 모든 예술 세계, 나아가 국제 외교 관계에 관심과 호기심이 많다. 미지의 세계의 문화, 역사 등 모든 걸 다양하게 좋아하고 알고 싶어하고 끊임없이 ‘스터디’하려 한다. 그런 추구가 오늘날 여러분이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


아침 5시 전에 일어나 열일곱 가지 신문을 본다. 읽지 못한 기사는 스크랩해두고 차 안에서 읽거나 신문이 나오지 않는 일요일에 모아 읽는다. 나는 휴일이 싫다. 출근을 못하는 연휴가 자주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오전 9시 반쯤 사무실에 출근해서 국내외 패션쇼를 끊임없이 준비한다. 하나가 끝나면 바로 다음 컬렉션을 준비해야 한다. 틈틈이 대사관 리셉션, 문화 행사, 예술 행사, 시상식에 참석한다. 오페라나 콘서트에 갈 때 주한 외교 사절들을 초청해서 함께 간다. 대사들은 나이가 대개 50~60대인데 그전까지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최고 수준의 문화 행사에 많이 초청받기 때문에 대화 수준이 굉장히 높다. 패션쇼에 와서도 작품에 깃들인 디자이너의 철학과 메시지, ‘정신적 에스프리’에 대해 얘기한다. 패션쇼는 여성이 관심을 갖는 것으로 상식화되어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적 수준의 외국 교향악단 또는 공연예술단이 한국에 오거나 조수미·정명훈 같은 세계적인 한국 출신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열릴 때 한국이 정말 굉장한 나라라는 걸 느끼게 된다.


 
항상 공연장의 가운데 맨 앞줄에 자리 잡는 걸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예술가와 연기자들의 특성 및 개성을 굉장히 깊이 있게 관찰한다. 음악 감상이 목적이라면 집에 좋은 오디오 시설 설치해놓고 들으면 된다. 나는 그 이상의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아티스트의 눈동자, 손끝 하나의 움직임도 관심 있게 본다. 소리가 제일 좋다는 공연장 1층 중간이나 2층 발코니에서는 이런 섬세한 움직임을 볼 수가 없다. 원래 1층 중간과 2층 발코니가 제일 비싸고 맨 앞은 2등석인데 7~8년 전부터 앞자리가 다 특석이 돼버렸다. 세종문화회관은 C줄 1열이 12석.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도 C줄 1열이 12석, 오페라하우스는 B줄 1열이 15석이다. 나는 음악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감상하는 걸 즐기기 때문에 한꺼번에 예약한다. 
명성이나 인기와 달리 사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웃으며) 사실이다. 사업적인 분야에는 실력이 없다. 디자이너 생활 38년 만에야 내 소유의 부티크를 갖게 됐다. 요즘에 와서 아파트 인테리어, 가전제품 신용카드를 디자인했지만 그것도 라이선스 계약을 한 것이지 직접 운영하는 건 아니다. 디자이너가 자기 세계를 이끌어가야지 지나치게 외국의 트렌드를 따르다 보면 독창성이나 개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한국 디자이너로서, 아시아인으로서, 동양인으로서, 한국과 동양의 역사, 문화 세계를 좋아하고 소중히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적이면서 아시아적인 왕실의 다양한 문양을 재창조하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적 소재만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유럽의 비잔틴·바로크·로코코·르네상스 시대의 모티브를 아시아 왕실의 그것과 조화시켜 굉장히 서구적이면서도 동시에 동양적인 모티브를 추구한다.


싱글 대디로 아들을 키워 손자도 보았다는데….


아기를 굉장히 좋아했지만 결혼은 안 하고 입양하게 됐다. 사람들이 자기 핏줄 아닌 아기를 키우며 느끼는 정은 친자식 친부모보다는 덜할 것으로 상상하는데, 오히려 더 강하다. 우리 아들이 사립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하루는 3학년 형아에게 맞아 이가 아프다고 했다. 그날 밤 분해서 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들과 같이 스쿨버스에 타서 문제의 3학년생에게 맞은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더니 일곱 명이나 손을 들었다. 그래서 문제 학생을 야단치고 학교로 가서 교장·담임 선생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그 다음부터 그 아이가 다른 애들을 때리지 않았다고 하더라. 나는 그만큼 극성 학부모였다. 아들은 밝게 모범적으로 잘 자라 결혼했다. 손자 손녀가 열흘 전에 두 돌 지났다. 현서와 현류는 이란성 쌍둥이인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 얘들이 “합지, 합지” 하고 재롱떨 때, 그것이 나의 행복이다.


인터넷에 ‘앙드레 김 어록’이 올라 있고, ‘우리말 해침꾼’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몰지각하고 논할 대상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를 좀더 깊이 있게 관찰해서 말해야지, 경박하고 경솔한 판단이다. 나는 병적으로 한국을 사랑한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하다. 개그맨들이 내 흉내 내는 것을 듣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개그맨들이 내는 흉내는 내가 보기에도 민망하다. 그런데 이상한 효과가 나타난다. 사람 많은 데 가면 팬들이 더 열광적이다.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영국식 옥스퍼드 악센트를 좋아한다. 미국을 자랑스러운 우방이라 생각하지만, 영어는 역시 영국식 영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옥스퍼드 악센트를 그대로 다 쓰기보다는 미국식 영어와 조화를 이뤄 말한다. 내가 공부한 중학교에서는 옥스퍼드 악센트를 많이 썼다. 나는 품격 있는 영어를 좋아한다. 영어를 들었을 때 얼마나 지적이고 품격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수준도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차원에서 관찰해야지 개그맨이 웃기려고 과장한 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을 문화 아이콘으로 만든 순백 의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다.


어릴 때부터 무조건 흰색의 세계를 좋아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밤사이 눈이 쌓여 지붕과 온 마을이 온통 하얗게 덮일 때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걸 경험했다. 계곡과 호수의 맑고 투명한 물, 크리스털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보다시피 부티크에도 크리스털 장식을 많이 했다. 다음에 인테리어를 바꿀 땐 신선하고 충격적인 컬러로 변화를 주고 싶다. 하지만 옷은 늘 흰색이 될 것이다. 흰색을 입으면 집중력이 좋아진다. 20여 년 전까지는 다양한 색을 입었는데 다른 사람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아서 그런지 지금은 그런 색을 대봐도 어울리지 않는다.


특유의 메이크업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

세계적 디자이너를 인터뷰한 기사 어디에도 그렇게 세련되지 않은 질문은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앙드레 김을 차별화하는 중요한 요소이지 않은가?

처음에는 방송 출연하면서 결점을 커버하기 위해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굴이 알려지게 되어 계속 하게 됐다. 장동건·송승헌 같은 남자 스타들도 모두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가? 아이섀도를 바르거나 립스틱을 칠하는 것도 아닌데, 메이크업이라는 표현은 좀 지나치다(하지만 그는 사진 촬영에 앞서 한참 동안 메이크업을 했다).


후계자 양성과 앞으로의 계획은? 


아쉬운 점도 많고 부족한 점도 많다. 지금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속 공부, 연구해야 한다.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끝이 없다. 45년 전보다야 나아졌겠지만 점점 공부하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아들은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고 있다. 어시스턴트 디자이너가 여러 명 있지만 아직 정해진 후계자는 없다. 참신하고 성실한 사람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모든 걸 다 한다. 현재 해외 부티크 론칭 계획은 없지만 직접 수출을 추진 중인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