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파헤친 '사랑의 비밀'
  • 조철(출판 기획자) ()
  • 승인 2007.03.0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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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일간의 폭풍 사랑>/KBS 감성과학 가큐멘터리 <사랑>의 모든 것 담아

"처음 만난 사람과 어떻게 잘 수 있어요? 사랑하지도 않는데….”
“사랑이요? 그거 3일이면 끝나요. 오래 가봐야 3개월이에요. 미국의 과학자가 그랬어요.”
“3개월이 아니고 3년이라고 들었는데요?”
영화 <연애의 목적>에서 여자 교생과 그녀에게 작업을 거는 남자 교사의 대화를 정리한 내용이다. 2005년 초여름에 나온 이 영화에는 사랑에 대한 어떤 자료를 ‘공부’한 흔적이 엿보인다. 영화는 한 차례 이별을 겪은 남녀가 사랑의 목적을 깨닫고 다시 결합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다.   
그해 봄 KBS 감성과학 다큐멘터리 3부작 <사랑>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내용 중 열정적 사랑의 유효기간을 9백일이라고 결론을 내린 미국 교수의 연구 결과는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연애의 목적>에 나온 그 대사가 그리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2001년에 나온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헤어지자는 여자에게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어야 하는데 변하는 데 대해 괴로운 심정이 작가와 관객의 공감을 샀다. 영화는 남녀의 이별로 끝이 난다. 제목처럼 낭만적인 사랑의 쓸쓸한 결말이 여운을 남길 뿐이다. 사랑을 관조하는 감성적인 영화이므로.
소개한 두 영화를 비교하는 잣대로 다큐멘터리 <사랑>을 내세운 것은, 사랑이 변하는 것을 그냥 괴로워하느냐 아니면 사랑이 어떻게 변하는지 이성적으로 알 것인지로 대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사랑>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2007년 봄날을 앞둔 사랑의 주인공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 방송을 제작했던 송웅달 PD가 방송에서 못 다룬 뒷얘기까지 고스란히 담아 사랑의 비밀을 차근차근 풀어보려고 애썼다.


사랑에 빠진 뇌의 수수께끼 풀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며 인류 역사를 이끄는 본질, 과연 사랑은 무엇인가? 영혼의 울림인가, 호르몬의 작용인가? 열정과 사랑의 차이, 연애와 우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토록 스킨십을 갈망하는 이유는? 1천억 개의 뇌세포를 바꿔놓는 엑스터시, 오르가슴의 실체는? 섹스리스(sexless)는 왜 우리를 그토록 우울하게 하는가?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사랑을 분석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렇게 하면 사랑이 지닌 마법과 같은 힘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사랑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감성과학 다큐멘터리 <사랑>은 그 매력적인 사랑에 대해 좀더 앎으로써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자 하는 과학적인 시도였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이 흥미롭다. 이 책의 지은이 송웅달 PD는 <생로병사의 비밀> 방송 중 잠시 숨을 돌리면서 다음 방송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초창기라 아이템 찾기가 쉽지 않던 당시, 함께 일하던 작가가 노래 한 곡을 소개해주었는데 바로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라는 옛날 가요였다. 그것이 비만·당뇨 등 질병 소재만 찾던 송PD의 마음을 순간 확 잡아끌었다. 인류의 영원한 질문인 ‘사랑’에 대한 비밀을 풀어보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1년이 넘는 제작 기간에 5개국을 돌아다녔고 40여 명의 과학자를 취재했다. 100쌍이 넘는 커플을 만났다. 유치원생부터 10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랑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지금까지 감성적으로만 다루던 ‘사랑’을 첨단 과학의 힘을 빌려 다루었다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의 특징이다. 연애를 시작한 지 100일째 되는 커플 다섯 쌍을 선정해 9개월에 걸쳐 최첨단 뇌 사진을 촬영했다.
지금까지 사랑에 빠진 뇌를 촬영해본 적은 있었으나, 동일한 커플을 대상으로 시간차를 두고 수차례 촬영해본 시도는 처음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랑은 호르몬의 위대한 작용임을 발견했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는 사랑의 양태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을 찾아냈다.
 
열정적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비밀은 바로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다. 도파민 수치가 증가하면 눈은 반짝이고 입술에는 미소가 그득하며 뺨은 홍조로 붉어진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예뻐 보이는 것이다. 또 연애한 지 100일째와 3백일째, 뇌 사진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시간 속에서 변한 것은 뇌만이 아니었다. 심장의 반응도 달라졌다. 연인들이 키스할 때 심장박동 수를 측정해 비교해본 결과 심장박동은 이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송PD는 열정적 사랑의 유효 기간, 즉 도파민의 작용 기간을 취재하기 위해 미국 코넬 대학 인간행동연구소의 신시아 하잔 교수를 만났다. 하잔 교수는 미국인 5천여 명을 2년에 걸쳐 인터뷰했는데, 그 결과 열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점은 평균 18개월에서 길어야 30개월 정도임을 발견했다. 격정이 넘치는 사랑은 길어야 ‘900일간’ 지속된다는 것이 하잔 교수의 결론이었다.


오래 지속하는 사랑의 비결 찾아  


 
송PD는 백일몽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은 열정일 뿐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여정은 사랑이 ‘열정’에서 ‘애착’으로 모습을 바꾸어 계속되는 지점으로 향한다.
열정이 흥분과 황홀이라면 애착은 편안함과 익숙함이다.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고 돌보고 싶은 마음, 상대방에게 제일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 상대방과 함께 있을 때 더 안정감과 든든함을 느끼는 마음이다. 송PD는 이 애착 단계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며 책에서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연인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애착을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국내외 부부 30여 쌍을 대상으로 섹스에 대해 생생히 인터뷰한 내용도 눈길을 끈다. 6년 동안 편두통을 앓았던 여배우가 늦깎이 결혼으로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편두통도 사라지고 건강을 온전히 되찾았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결혼 75년째에 이른 김진원(100)-최영손(96) 부부. 배우자의 옆에 있다는 그 자체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버팀목이 될 뿐만 아니라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라고 금슬 좋은 이 부부는 믿고 있다. 이 책에서는 백년해로하는 부부의 사랑을 최고의 사랑으로 찬미하며, 그들의 공통된 특징을 정리했다.
결국 진정한 사랑이란 900일의 폭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폭풍이 지나고 난 뒤 노력과 인내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봄날은 금방 지나가지만 봄날 같은 사랑은 평생 지속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사랑의 감정이 시들해진 청춘 남녀의 이별 장면보다 노부부의 꼭 잡은 손에서 발견하는 축복 같은 오래된 사랑을 만나는 일이 더 즐거운 것이….
사랑을 하면 정말 예뻐진다. 늙어도 예쁘게 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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