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청의 시대’ 뚫고 희망을 울리다
  • 최충웅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방송통신연구원장 ()
  • 승인 2007.02.2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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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80년·가요 80년, 시대 따라 변화한 인기 가요·인기 프로들

방송 80년. 비록 일제 강점기였지만, 1927년 2월16일 경성방송이 최초의 전파를 송출한 지 80년을 맞았다.
당시 라디오 등록 대수 1천4백40대로 시작된 방송은 1960년대 흑백TV, 1980년 컬러TV, 1995년 케이블TV, 2002년 위성방송, 2005년 DMB 방송에 이어 올해 시행 예정인 IPTV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발전해왔다.
방송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애환과 민중의 삶을 짙게 간직해온 것이 바로 대중가요이다. 대중가요는 방송을 통해 전파되고 애창되면서 가요사의 맥을 이어왔다.
가요는 방송 전파를 타면서 유행을 만들어냈고, 방송은 가요로 대중을 끌어들였다. 방송과 대중가요는 시대의 정치·사회적 문화 현상을 수용하거나 반영하면서 다양한 양식과 형태로 변화했다.
일반적으로 한국 대중가요의 시발점을 1926년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 공부한 소프라노 윤심덕은 <사의 찬미>를 작사한 문학청년 김우진과 열애에 빠진 끝에 현해탄에서 동반 자살했고 이 사실이 선풍을 불러일으켜 가요 역사 태동에 불씨를 지펴주었다.
<사의 찬미>는 이바노비치 곡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것이어서 최초의 창작 가요는 1927년에 발표된 <낙화유수>로 본다. 방송 초기인 1927년 7월에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2 대 3의 비율로 편성되어 민요 <적벽가> <철도창가> 등이 전파를 탔으며, 최남선의 신시조 <학도가>와 대중가요의 전신으로 평가되는 <새야새야 파랑새야> <희망가>, 이수일·심순애를 노래한 <장한몽가>, 신민요 <청춘가> <경복궁타령> <방아타령> <개성난봉가> 등이 유행했다.

 
1928년부터는 음악 녹음이 시작되면서 진공관 라디오와 함께 유성기 음반 시대를 열어갔다. 라디오와 유성기는 부유한 집에서나 살 수 있는 물건이어서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함께 듣는 일이 많았다.
광복 전후의 대중가요는 나라 잃은 설움, 실향, 방랑하는 나그네, 남녀의 사랑과 이별 등을 담아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짝사랑> <나그네 설움> <애수의 소야곡> <목포의 눈물> <꿈에 본 내 고향> <알뜰한 당신> <방랑가> <번지 없는 주막> 등이다.
광복 전후의 가요는 일본 엔카(演歌) 형식의 트로트 양식으로 정립되면서 한편에서는 <경복궁타령> <처녀총각> 같은 신민요가 대두되었다. 우리 가락에 해학적 표현을 실은 신민요 양식은 1950년대 황정자의 <남원의 봄 사건>, 1960년대 김세레나의 <갑돌이 갑순이> <새타령>, 1970년대 하춘화의 <잘했군 잘했어>로 명맥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는 작곡가 박시춘·손목인, 가수 고복수·이난영·남인수·황금심·백년설·진방남·김정구·백설희·장세정·송민도 등의 거목이 가요계를 이끌었다.
8·15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귀국선>이 나오고 왜색 가요 추방 운동이 일면서 대중가요의 새바람이 불게 되었는데 <신라의 달밤>은 현인 특유의 창법으로 인기를 끌었다.
남북 분단과 6·25 전쟁으로 <가거라 삼팔선> <꿈에 본 내 고향> <단장의 미아리고개> <전선야곡> <전우야 잘 자라> 등과 피난살이의 고된 생활을 애절하게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한 많은 대동강> <아내의 노래> <판문점의 달> <삼팔선의 봄> 등이 시대의 아픔을 대변했다.
최초의 라디오 일요연속극 <청실홍실>은 전쟁 미망인과 처녀가 한 남성을 두고 갈등하는 내용으로 전쟁 후 시대상을 리얼하게 그려 폭발적인 청취율 기록을 세우면서 주제가 역시 크게 히트했다.
가요 프로그램, 최고 인기 누려
특히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주관하는 AFKN 라디오(1950년)와 AFKN TV(1957년)의 방송으로 미국의 팝송, 재즈, 컨트리 뮤직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에 영향받아 미8군 무대 출신 가수들이 등장했는데 지난 2월20일 타계한 댄스 가수 1호 이금희를 비롯해 패티김·최희준·위키리·유주용·박형준·한명숙·현미·신중현·조영남 등이 유명세를 탔다. <럭키 서울> <럭키 모닝>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아리조나 카우보이> <샌프란시스코> <슈산보이> <기타부기> <노래가락 차차차> 등이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에는 민간 라디오 방송 시대가 열렸다. 1954년 CBS기독교, 1959년 부산MBC, 1961년 MBC, 1963년 DBS동아, 1964년 TBC동양방송 등이 연이어 개국했다. 특히 1961년부터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생산되면서 라디오 수신기 보급이 급증해 라디오 방송 전성기를 맞았다.
1960년대 가요계에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키다리 미스터 김> 등 트위스트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서민의 애환을 노래한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회전의자> <사람 나고 돈 났지> 등이 인기를 끌었다.
청취율 경쟁을 의식한 가요 프로그램들은 청취자가 전화로 신청한 음악을  디스크자키(DJ)가 진행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DBS의 <탑튠쇼>와 <3시의 다이얼>의  팝PD인 최동욱은 DJ 1호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전화 리퀘스트를 시작한 것은 곽규석 진행의 <다이얼 Y를 돌려라>(CBS)였다. 이로써 방송계는 DJ 프로그램 시대를 열게 된다. TBC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MBC의 <별이 빛나는 밤에>, DBS의 <0시의 다이얼>은 청취자의 사연과 신청곡을 띄워주는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이 시기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팝송·샹송·재즈·칸초네·포크·영화음악 등 외국 가요가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1969년에는 클리프 리처드 내한 공연에 여고생·여대생들이 몰려가 손수건과 속옷을 던지며 괴성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0년대 TV 방송의 개막은 방송사에 큰 획을 긋는 분수령이기도 하다. 1961년 KBS TV, 1964년 TBC TV, 1969년 MBC TV의 개국으로 본격적인 관·민영 이원 체제의 TV 3사 시대를 열었다.
가요 프로그램으로 <KBS 그랜드 쇼>, MBC의 <OB그랜드 쇼>, TBC의 <쇼쇼쇼>가 토요일 저녁이면 일대 결전을 벌였다. 최정상 인기 가수들의 열창을 안방에 앉아 시청하는 것이 주말의 청량제 역할을 했다.
미8군 쇼 무대 출신 인기 가수들과 중창단이 가세를 했다. <즐거운 잔칫날>의 블루벨스,     <꽃집 아가씨> <육군 김일병>의 봉봉, <빨간 마후라>의 쟈니브러더즈, <남성 금지 구역>     <울릉도 트위스트>의 이시스터즈와 <커피 한잔>의 펄시스터즈 등의 경쾌한 율동은 TV 화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TBC의 <쇼쇼쇼>는 한국 가요쇼의 대명사가 되었고, 언론 통폐합으로 KBS에 흡수되기까지 쇼 프로그램으로서는 7백86회의 장수 기록을 남겼다.
TBC TV 일일연속극 <아씨>는 1970년 3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장장 2백53회로, 당시 TV 단일 프로그램 중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이미자가 부른 주제가 역시 대히트했다.
광복 이후 반일 정서와 이승만 대통령의 극일 정신은 왜색 가요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1957년 공보처의 건전 가요 진흥 정책으로 KBS 전석환의 <노래의 메아리> 프로그램과 한명숙의 <우리 마을>, 최희준의 <팔도강산>, 이석의 <비둘기집>, 한상일의 <웨딩드레스> 같은 이른바 건전 가요들이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미8군 무대 출신 가수들의 뒤를 이어 <임과 함께>의 남진, <머나먼 고향>의 나훈아는 양대 남성 트로트 가수로 쌍벽을 이루며 가요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시기 유행 패션으로 핫팬츠, 미니스커트 등 노출형 의상과 장발족 히피 선풍이 상륙하게 된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가요와 방송은 전환기를 맞게 된다. 1962년 7월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어 마을 이장집마다 라디오 수신기가 갖춰지고 스피커를 통해 중계되는 라디오 방송에서 <새마을 노래>와 <잘살아 보세>가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장발족 출연 금지와 함께 쇼 프로그램에서 요란한 고고 리듬과 사이키 무대 조명, 주체성 없는 외국풍 노래, 퇴폐적이고 비관적인 노래, 왜색 가요 등이 ‘자율 규제’라는 명분을 달고 사라졌다. TV 쇼 무대에서 반짝이는 점멸등이 철거되고 당시 인기 정상을 달리던  남자 가수의 야외 촬영 중 장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방송되어 KBS의 담당 PD가 파면되기도 했다.
한·일 수교 직후인 1966년 초에는 이미자의 대표곡이자 최고 히트곡인 <동백아가씨>가 왜색조라는 이유로 금지 조처를 당해 가요계 전체가 충격을 받았다.  기존의 월북자 가요를 포함해 조영남을 스타덤에 올린 번안 가요 <딜라일라> <아침이슬> 등 무려 9백1곡이 금지되었다. 외국어로 된 가수들의 예명도 우리말로 대치되었는데 ‘김세레나’를 ‘김세나’, ‘바니걸즈’를 ‘토끼소녀’ 식으로 바꿔야 했다.
경제개발 정책으로 젊은 세대의 이농 현상이 확산되고, 베트남 파병으로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힘차게 방송 전파를 타며 유행했다. 비교적 획일적이던 생활문화 양식이 세대 간 집단별·개체별로 다변화되고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면서 ‘학생운동’ ‘최루탄’은 이 시대의 키워드로 등장하게 된다.
1970년대는 포크송·통기타·청바지·생맥주로 대표되는 대학생 중심의 청년 문화가 막을 열면서 대중문화의 세대 교체가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AFKN과 심야 방송의 팝송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뽕짝’으로 지칭되는 트로트가 왠지 촌스럽게 느껴지고 일제 강점기 엔카풍의 트로트에 젖은 기성 세대의 권위주의에 대한 배타성과 반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귀국한 포크의 원조 한대수를 비롯해 조영남·윤형주·김세환·양희은·이장희·김민기와 듀엣으로 투코리언즈·어니언스·뚜아에무아·라나에로스포 등이 포크 세대를 확장해갔다.
 
컬러 방송과 함께 공개 방송 일반화

이즈음 청년 문화에는 록이 자리 잡게 된다. 최초의 록 그룹인 신중현의 에드포, <해변으로 가요>의 키보이스, 히식스, 영사운드의 등장이 두드러지며 전자 악기의 사이키델릭 록과 고고춤이 유행했다.
한편으로는 국제가요제가 빈번히 열린 시기여서 이봉조·정훈희 콤비의 <무인도>와 길옥윤·패티김의 <사랑은 영원히>가 출전해 한국 가요를 세계 무대에 떨치기도 했다. 
통기타·청바지로 상징되는 청년 문화는 대마초 사건으로 된서리를 맞게 된다. 포크 가수들의 방송 출연 금지로 방송사들은 가요계 공백 대처 방안이 시급해졌다. 바로 제도권 밖의 아마추어 캠퍼스 음악을 끌어들이는 방편으로 구상된 것이 대학가요제였다. 1977년 <MBC 대학가요제> <TBC 해변가요제> <강변가요제>를 통해 배철수·구창모·홍서범 등이 제도권에 진입하고 <아니 벌써> 산울림의 김창완도 합세한다. <나 어떡해> <탈춤> <불놀이야> <일곱색깔 무지개> <그대로 그렇게>와 같은 시기에 딕 패밀리의 <나는 못난이>,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로 이어졌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는 TBC  TV <오라 오라 오라>, KBS TV <젊음의 행진>, MBC  TV <영11> 등이 통기타 잔류 부대, 대학가요제 수상 그룹, 그룹 사운드의 무대가 되었다. 이 시기 TV 가요 프로그램으로 TBC TV <가요 베스트 10>, MBC  TV <인기가요>, KBS <가요 톱10>이 서로 경쟁했으나 가요 장르별 순위 측정의 객관성 문제 등 우여곡절로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에는 컬러TV 시대가 열리면서 KBS TV의 <100분 쇼>, MBC TV의 <쇼 2000> 등이 공개 방송 진행으로 바뀌면서 버라이어티 성격을 강화한다. 이는 1970년대 후반 공개 생방송의 생동감과 활기로 가능성을 입증해준 KBS TV의 <여의도 청백전>과 TBC TV의 <올스타 청백전>의 공개 형식을 그대로 옮겨왔다.
1991년 신생 민영방송 SBS가 <쇼 서울 서울>로 가세했으나, 가수 노래 나열 식의 가요 프로그램은 점점 쇠퇴했다. 가요계에 본격적인 ‘오빠 부대’를 몰고 온 조용필에 이어 김건모, 서태지와 아이들은 랩 음악과 본격적인 댄스 가수 시대를 열어간다.
2000년대에는 HOT·핑클·베이비복스·동방신기·비·보아 등이 해외 무대에서 한류 가수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신세대가 추구하는 댄스 음악과 더불어 현철·송대관·설운도·태진아·장윤정으로 이어지는 트로트 계열이 병존하면서 가요계 판도는 장르별·세대별로 세분화하는 양상을 띠었다.
1980년대 워크맨의 등장과 1990년대 CD, DVD에 이어 2000년대 인터넷 확산에 따른 소리바다 MP3, 다기능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음반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TV 방송에서의 가요 쇼도 사라졌다.
굳이 TV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접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개인 취향 매체의 자유로움이 가져다준 편의성이 욕구를 충족케 했다. 이는 뮤직비디오와 노래방의 대량 보급으로 가요에 대한 TV 시청 욕구가 분산되고 희석된 현상이라 하겠다. SBS의 <도전! 1000곡>은 오히려 노래방을 TV로 끌어들여 성공한 경우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음반 제작은 10대 청소년을 주 타깃으로 삼고 신세대 취향의 음악을 집중 보급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1995년 케이블TV 등장에도 음악 전문 채널은 여전히 10대 청소년 대상의 뮤직비디오 중심의 편성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최근 가요 중심의 ‘TV 가요’ 채널 개막은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가요 팬을 위한 한국 가요 전문 채널이라는 의미를 부각시켜주었다. 위성DMB 오디오 채널에서도 종일 신청곡 중심의 음악 전문 채널이 운영되고 있으며, 올해는 IPTV에서도 가요 전문 채널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가요 방송이 쇠퇴해가는 과정에서 그나마 KBS <가요무대>가 1천13회로 해외 근로자·동포를 위해 해외 공연을 7회 가졌으며, <KBS 전국노래자랑>은 국내 TV 역사상 최장수로 1천3백63회에 2만5천 명 출연 기록을 세웠다.
가요계가 건강하고 탄탄해지려면 반짝 인기를 노린 냄비성 상업 가요를 지양하고, 인간의 진솔한 삶이 묻어나는 노래, 진정한 인간의 참된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철학이 담긴 노래, 많은 민중이 공감하고 진한 감동으로 가슴에 닿는 노래들이 긴 세월을 두고 애창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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