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있어 한국이 따뜻했다
  • 왕성상 편집위원 ()
  • 승인 2007.02.2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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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송 80주년 특별 무대 오른 ‘국민 가수’ 이미자의 ‘가요 반세기’

 
평생 노래 외길을 걸어온 이미자(67)는 느낌이 편하게 다가오는 가수다. 노래를 언제 들어도 그렇고 풍기는 외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국민 가수’ ‘가요 여왕’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노래의 힘은 대단하다. 팬들은 ‘절세 가인(歌人) 이미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녀는 1990년 기네스북에도 오른 인물이다. 그때까지 내놓은 음반은 5백60장, 발표곡수는 2천69곡. 그 이후 것까지 더하면 총 6백여 장의 음반과 2천1백여 곡을 내놓았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내고 노래를 취입한 가수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중에는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흑산도 아가씨> <아씨> <여자의 일생> 등 주옥같은 곡들이 수두룩하다. ‘살아 있는 트로트 역사’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50년 가까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 ‘작품’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절제된 선율로 격동의 세월, 힘든 삶을 살아온 민초들에게 안식을 찾게 했다. 가요계 사람들은 ‘서민들의 한을 예술로 승화시켜 상처받은 가슴을 어루만지는  데 청춘을 바쳤다’ ‘가요 황제로 불린 남인수와 함께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가수’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1998년 조선일보) △한국을 움직이는 100인의 여성(1985년 한국일보) △한국인이 좋아하는 인물 베스트 10 선정은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벽돌을 쌓듯 꾸준한 노력과 인생의 고비들을 이겨내며 얻은 영광의 결과물이다.
1941년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난 그녀가 가요계에 본격 발을 디딘 것은 1959년. 순박한 외모에 입이 약간 튀어나온 것이 특징인 열아홉 처녀가 음반 녹음을 위해 마이크 앞에 서면서 노래 인생은 시작되었다. 한 가정집의 응접실 벽에 유리창을 붙여 만든 간이 녹음실에서 추위에 떨며 노래를 불렀다. 추위보다 자신의 이름으로 첫 음반을 낸다는 흥분과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 듯했다. “보기만 하여도 울렁~ 생각만 하여도 울렁~ 수줍은 열아홉 살 움트는 첫사랑을 몰라주세요~.”
 
일대기 그린 영화와 연구 논문도 나와

경쾌한 멜로디의 데뷔곡 <열아홉 순정>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문성여고 시절 ‘빨리 졸업해 가수가 돼야지’라고 생각하며 기회만 있으면 노래 대회에 나가 1등을 독차지했던 그녀가 소원을 이루는 날이기도 했다. 여고 2학년 말 최고의 청취율을 올렸던 KBS 라디오 노래자랑대회에 엄마 옷을 입고 나가 1등을 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학생 참가 불가’였음에도 변장을 하고 부른 노래는 나애심씨의 탱고곡 <언제까지나>. 그녀의 부모는 노래도 못 부르고 가난했지만 천상의 목소리를 유산으로 받아 행운을 안은 것이다.
당시 6·25 전쟁의 고통에 시달린 국민들의 삶은 힘겨운 굴레였다. 이럴 때 나온 <열아홉 순정>이 내뿜는 순진성은 잠시나마 생기발랄함으로 채워주었다. 작곡가 나화랑씨에게 발탁되어 취입한 이 노래를 그녀는 요즘 공연에서도 그때를 생각하며 가끔 부른다.   
이렇게 해서 가요계에 뛰어든 그녀는 빼어난 가창력으로 이목을 끌었다. 음반업계와 작곡가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으나 결혼 등으로 5년가량 무명 가수에 머물렀다.
1964년 여름 임신 8개월로 만삭이 된 그녀는 방음을 위해 겹겹이 칸을 친 녹음실에서 얼음 수건으로 목과 얼굴을 문지르며 <동백아가씨>를 겨우 녹음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그때 뱃속에 들어 있던 아이가 딸인 가수 정재은(43)이다.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인 이 노래는 음반이 나오자 1주일 만에 매진되었고 35주 동안 음반 판매 1위를 기록하면서 대히트했다. 지금의 1천만 장과 맞먹는 1백만 장의 음반이 팔려 전국이 들썩거렸다. ‘이미자’ 이름이 세상에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무명 신인 가수가 일약 스타로 뜬 것이다. 언론에서는 가요계 판도를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여세를 몰아 1965년 영화 주제가로 사용된 <울어라 열풍아>도 <동백아가씨> 이후 최고의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히트곡 대열에 올랐다. ‘가요계 전설’이 된 그녀는 이어진 영화 주제가, 드라마 주제가 등 취입곡마다 대성공을 거두었다.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아네모네> <그리움은 가슴마다> <타국에서> <황포돛대> <여로> <아씨> <지평선은 말이 없다> <홍콩의 왼손잡이> 등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인기곡들이 쏟아졌다. 히트곡 <섬마을 선생님>은 1967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방송사의 가수왕, 10대 가수상, 훈장 등 수상 경력은 부지기수다. 데뷔 10년 만인 1969년에는 1천 곡 기념 리사이틀을 했다.
인생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좋은 일만 계속되지는 않았다. 창법이 왜색적이고 천박하다는 이유로 1965년 말~1970년 사이 그녀의 3대 히트곡인 <동백아가씨>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가 금지곡으로 묶여버린 것이다. 가수에게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하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그녀에게 햇볕이 들기 시작했다. 1987년 8월 금지곡들이 풀렸고, 198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수 생활 30주년을 기념하는 리사이틀을 했다.
그녀는 가수 생활을 해오는 동안 뉴스 메이커가 된 적이 매우 많다. 1967년 그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엘레지의 여왕>이 한형모 감독에 의해 제작되었고, 효성대 작곡과 박종문 교수가 음대 교수로는 처음 쓴 ‘대중 가수 이미자를 생각한다’는 제목의 논문도 나왔다. 또 1999년 40년 가요계 족적이 담긴 가요 <노래는 나의 인생>(박춘석 작곡)과 자전 에세이집 <인생 나의 40년>까지 만들어져 눈길을 끈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이루어진 베트남 참전병사 위문 공연도 숱한 화제를 남겼다. 사이공(현재 호찌민)에서 비둘기부대 병사들과 울면서 <동백아가씨>를 수없이 반복해 부르기도 했다. 장병, 단원, 가수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어 국민들 가슴을 아리게 한 것이다. 붕타우로 가다 당한 교통사고, <월남 가신 오빠 안녕> 취입도 얘깃거리였다.
한 번 따라 부르고 취입할 만큼 음악성 탁월
그녀가 가수로 대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타고난 목소리다. 특별한 목소리 관리 없이도 저음과 고음이 자유자재로 가능하고 애조 띤 음색도 천부적이라는 평이다. 여기에 독특한 창법, 감각적 음악성이 어우러져 ‘이미자만의 소리’가 나온다는 것. 스케줄에 쫓겨 시간이 없을 때는 작곡가가 피아노 반주로 들려주는 노래를 한 번 따라 불러본 뒤 취입했을 정도로 음악성이 뛰어나다. 초반기 청순하고 애처롭게 들렸던 성음도 갈수록 기교적으로 발전되고 원숙 단계로 접어들어 감칠맛이 난다는 평가이다. 
다음은 실력 있는 음악인들과의 만남이다. 박시춘·나화랑·백영호·박춘석 등이 바로 그들이다. 당대의 쟁쟁한 작곡가, 작사가들이 운명처럼 다가와 신선한 음악의 물줄기를 계속 대주어 오늘의 그녀를 만들었다. 아무리 뛰어난 목소리를 가졌더라도 제대로 된 음악인들과 연결되지 않으면 성공은 불가능한 것이 가요계 현실인 만큼 이들과의 만남은 아주 절묘했다.
대중을 파고드는 서민적 스타일, 우리 정서에 맞는 노래 소재도 성공 포인트다. 한결같은 순박함,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튀지 않는 언행, 수수한 옷차림이 브랜드처럼 대중에게 다가서 있다. 데뷔 초기 티 없는 시골 처녀의 용모에서 차츰 원숙한 여성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무대 제스처 또한 그저 마이크를 잡고 몇 발짝 옮기는 것이 전부다. 옷차림도 팔뚝이나 가슴을 드러낸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나온 적이 없다. 그래서 쉽게 흉내 내거나 패러디하기 까다로운 가수로 꼽힌다.  
그의 노래에는 민족의 역사적 소재나 여성성 문제도 진지하게 등장한다. 민중적 호흡과 일치하고 모성적 위로와 격려를 준다. 삶 자체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꽃(아네모네·들국화·동백꽃 등), 새(두견·기러기 등), 강, 바다를 소재로 한 노래가 많고 도시보다는 농촌 서정이 두드러진다. 금지곡으로 묶였던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황포돛대> 등이 좋은 사례다. 이는 겨레의 한·고통·애환과도 통한다.
이동순 영남대 교수는 최근 가요 비평서 <번지 없는 주막>을 통해 “이미자 노래에는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애잔한 상징성으로 정서의 둥지를 틀고 웅크려 있다”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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