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 국가'에서 살기 힘드네
  • 로스앤젤레스 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7.02.12 14: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건널목 휴대전화 사용 금지' 법안 싸고 논란..."국민이 아이냐" 반발

 
내 잘못으로 내가 다치거나 다칠 뻔해도 벌금을 내야 한다면 좀 황당할 것이다.
정부가 개인을 마치 유모처럼 따라다니며 끔찍이도 간섭하고 보호해주는 나라를 ‘유모 국가’라고 부른다. 약간 경멸하는 투로 ‘복지 국가’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한데, 미국·영국·호주·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을 말한다. 1965년 영국 하원 아이에인 머클러드 의원이 처음 사용했으며, 미국의 진보 정치학자 노엄 촘스키가 이 말을 즐겨 사용한다.
최근 미국 뉴욕 주 상원의원  칼 크루거는 길을 건널 때 휴대용 정보단말기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크루거 법안’이 발효하게 되면 뉴욕 주 내 어느 도시에서든 길을 건널 때 휴대전화 통화를 하거나,  MP3를 귀에 꽂고 있거나,  휴대용 게임기로 게임을 하다가 경찰에 적발되면 1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된다. ‘당신은 당신의 실수로 교통사고를 당할 뻔했으니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크루거 의원은  “정부는 개인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통상적으로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해석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크루거 의원은 자해 행위나 자해 기도 행위도 처벌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휴대전화로 얘기하면서 찻길을 건너면 자해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 그는 휴대용 전자 기기 범람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사고는  공공 안전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크루거 법안에 대한 시민의 반응은 찬반으로 나누어진다. 아이팟 등 최신 전자 기기에 익숙하지 않거나 별로 흥미를 갖지 않는 중년층은 절대 찬성이다. 휴대전화나 아이팟을 귀에 꽂고 찻길을 건너다 보면 급하게 달리는 버스의 경적 소리를 듣지 못해 피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 시 브루클린에서는 지난해 9월 이런 사고가 세 건이나 발생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길을 건너던 젊은이가 ‘조심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해 교통사고를 당했다. 한 시민은 ‘아이팟을 사용하더라도 자동차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는데 별것을 다 이래라 저래라 한다’라고 빈정댔다.
이 법안이 유모 국가의 전형 가운데 하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부가 국민이나 시민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처신해야 할 안전 문제에 너무 깊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즉 국민을 어린아이 보듯 바라보며 행동 하나하나를 간섭하는 유모와 같다는 것이다.


 
“미국, 유모 국가적 경향 짙어졌다” 연구 보도도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 가운데 하나인 케이토 연구소가 자체적으로 작성한 사회정책 보고서는  미국의 지난 30년간 각종 법률과 조례, 규제안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 국민 보건이나 어린이 보호 같은 문제에서 이같은 유모 국가로서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 정부는 정부의 권력을 동원해 개인 행태에 대해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고 지적하고, 언론이나 사회 단체들을 통한 캠페인으로 예방이 가능한 일까지 정부가 나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더구나 입법 권한을 가진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개인 문제에 간섭하려 하고 있으며 이를 정치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역할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케이토 보고서는 미국 정부가 보인 가장  대표적 유모 국가의 모습은 이른바 ‘마약과의 전쟁 선포’라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마약이 사회 병폐의 주된 요소인 것은 사실이지만 마약을 판매하는 딜러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용도로 구매하거나 사용하는 사람까지 처벌하는 것은 유모 국가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자동차 탑승시 안전벨트를 착용하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으며  3개 주에서는 모터사이클 운전시 헬멧 착용이 의무 조항이다.  정부가 간섭하지 않아도 될 규제 대상으로는 또 섹스 장난감, 누드 댄싱, 스트립쇼 클럽, 맥주 광고, 담배 광고, 스노모빌, 모터스쿠터, 희귀 애완동물, 공공장소 흡연 등이 지목된다.
미국의 소비자 보호 단체인 소비자 제품 안전위원회는 한 유아용품 제조 회사의 아기용 목욕 의자 제조를 법으로 규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아기용 목욕 의자는 너무나 안전해서 부모가 의자에 지나치게 의존해 아기를 살피는 데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국교통안전협회는 비행기 탑승시 유아용 티켓 발매를 제안했다. 부모의 품에 안겨 비행기 여행을 할 수 있는 어린아이들에게는 별도의 좌석이 필요하지 않아 지금까지 탑승 요금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 장거리 여행시 아기의 안전을 위해서는 아기용 좌석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부모나 보호자가 좌석 요금을 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지난 20년간 딱 한 차례 지켜졌을 뿐이다. 또 부모들은 아기용 티켓을 구입하는 대신 비행기보다 위험도가 높은 장거리 자가용 자동차 여행을 선호해 법률 제안의 의도를 무색하게 했다.

 
그러나 유모 국가는 이처럼 단순하고 실생활적인 문제에만 참견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기업의 경쟁이나 개인의 경제 활동까지 제동을 거는 경우도 많다. 고칼로리 식품 제조 회사에 대한 지방질세(Fat tax), 식당의 식품요소 함유량 규제 등도 이에 속한다. 이는 비만이 사회문제로 떠올라 있는 미국에서 가능한 법률 규제이다. 유모 국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만이 개인 책임이냐 사회 책임이냐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정부가 개인의 주택 등 부동산 거래에 깊숙이 개입해 이래라 저래라 할 때 그 정부도 유모 국가 신봉 정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한국도 당연히 유모 국가 신봉 정부 반열에 오를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인 유모 국가 신봉자로 앨 고어 전 부통령이 꼽힌다. 고어는 “정부는 (유모이기 전에) 할아버지·할머니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도 유모 국가 신봉자이다.  백악관  비서실장 앤드루 카드는 “부시 대통령은 국민을 10살짜리 어린이로  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오너십 사회’를 내세운 부시 대통령은 겉으로는 국민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유모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