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풀어낸 '오래된 고백'
  • 조규석(언론인) ()
  • 승인 2007.01.3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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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면에 비친 김지하의 내면/'개체적 인간'으로서 진솔한 감회 드러내

조규석 (언론인)

 
'김지하’라는 이름을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어떤 인물로 이해하고 있는가. 시인으로서인가, 민주화를 위해 싸운 투쟁가로서인가. 아니면 생명사상을 제창한 사상가, 아니면 사회운동가로서인가. 혹은 그 모든 것으로서인가.
여러 의미로 이제 이 사회의 원로가 된 김지하씨를 만나 오늘의 세상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들어본 지 이미 10여 일(<시사저널>  제901호 참조)이 지났다. 뒤늦게 그 만남에 대한 감회를 적기 위한 글을 질문형으로 시작한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교과서 속에서만 그를 만났을 오늘의 젊은 세대 - 그 가운데서도 아직도 ‘이념’을 위해서는 현실에서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투쟁’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이 글의 독자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편집 책임자가 내게 미리 주의 삼아 알려준 것은 그가 제시했다는 인터뷰 수락 조건이었다. 인터뷰하기 전 김지하씨가 내건 전제 조건은 정치 얘기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도 좋은 조건이었다. 고백하지만 정치는 나에게 대체로 혐오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치 얘기를 완전히 배제하고 어떻게 시사(時事)를, 세상을 ‘논’(論)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 얘기 없이, 정치 권력 때문에 파란의 삶을 살아온 시인의 내면에 대해 과연 진솔한 ‘고백’을 들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거처는 일산 도심에 있는 주상 복합건물의 높은 층이었다. 나와 기록을 맡은 인턴 기자를 맞이하는 그는 말 그대로 무덤덤했다. 현관 문을 열어주며 그가 무슨 말로 우리를 맞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개량형의 한복 차림이었다. 윗저고리의 색깔은 그의 표정처럼 무덤덤한 회색이었다.
응접실은 넓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좁지도 않았다. 6인용 소파가 응접실을 알맞은 넓이로 차지했고, 응접실 한쪽 벽과 현관 입구 좁고 짧은 통로에 세워진 두 개의 서가에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아주 추운 날이었지만 넓은 창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그 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일산 호수공원으로 이어지는 광장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응접실 소파에 앉은 내 등 너머에 주방이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아주 고전적인 색감의 짙은 감청색 옷차림을 한 시인의 부인이 질그릇 차 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왔다. 부인이 찻잔에 따라준 차는, 맛으로 미루어 우리의 전통 차인 듯했지만 무슨 차냐고 묻지는 않았다. 부인은 의례적인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물러갔다. 두 시간여의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기까지 우리는 부인의 자태를 더는 볼 수 없었다. 한국 문학사에 찬연하게 이름을 남길 작가의 따님이기도 한 시인의 아내는 그렇게 내색이 없었다.


가족의 소중함 말하면서 목메기도


나는 먼저 ‘말’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는 ‘언어의 타락’에 대해서, 그리고 언어가 타락한 시대의 시에 대해서 물었다. 정치는 묻지 말아달라는 그의 주문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막힘없이 조리 있게 답했다. 물론 특유의 비속어도 거침없이 나왔고 대중 매체에 그대로 기록하기에는 너무 전문적이라고 해야 할 내용까지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말을 듣는 사이 몇몇 시들 - 정확히는 감동으로 기억하고 있는 시구(詩句)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현실에서도, 시에서도 찾기 어렵게 된 아름다운 언어로서의 시구들을….


- 황톳길에 선연한/핏자욱 따라/나는 간다 애비야 (황토)
- 신새벽 뒷골목에/타는 목마름으로/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타는 목마름으로)


내가 외우고 있는, 그리하여 큰 소리로 읊을 수 있는 김지하의 시구는 이 두 구절뿐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시 정신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자부’해왔다. 괜한 소리가 아니다.
시 <황토>를 통해 그의 가슴에 맺혔을 한과 비애,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온 민중의 삶에 대한 그의 속 깊은 연민을,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통해 폭압의 시대를 산 그의 분노와 갈망을 각각 절절한 느낌으로 내 감성에 수용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청춘의 날에 그렇게 동시대 사람들의 평판에서 뛰어난 시인으로 자리매김했었다. 그렇다. 시인은 몇 편의 시로서, 몇 줄의 시구로서 불후의 생애를 확보하는 법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그것도 매우 소년적인 취향이지만. 가령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폴 발레리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로, 두보(杜甫)는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으로 각각 ‘위대한 시인’으로 내 의식에 각인되어 있다. 김지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와 동세대인 그를 우리 시대의 뛰어난 시인으로서 기억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의 모든 시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를 만난 것은 시를 얘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모처럼 내놓은 시 <허공은 신>은 현실과 연관해서 읽으면 그 함의(含意)가 ‘중도’였고, 시를 발표한 자리에서 그가 실제로 중도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세상에서 유행이 되어버린 이념 문제를 꺼내 그의 생각을 물었다. 우리는 정치라는 단어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정치 현실에 대해서는 묵시적 비판을 공유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쯤에서, 그의 연보(年譜) 일부분을 떠올릴 필요가 있겠다. ‘1964년 6월3일 대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에 가담해 처음으로 4개월간의 감옥 체험을 한 이래 수배-연행-구속-석방-도피를 거듭하다가 1974년 4월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주일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80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 연보로는 20여 년 이어진 그의 형극의 삶도 참으로 간단하게 요약된다. 개인의 과거란 거기에 어떤 기막힌 사연이 있다 한들 이처럼 서너 줄만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
긴급조치 발동과 더불어 강릉에 숨어 지내던 그가 체포되기 석 달 전에 쓴 시 <1974년 1월>의 한 구절이다. 맞다. 그는 그렇게 20~30대의 젊은 날을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꼽고’ 보냈다. 그리고 이미 알려진 대로 감옥 생활 만 6년의 결과로 얻은 것이 바로 ‘생명 사상’이다. 나와의 대담에서도 그는 그것을 다시 소상히 설명했다.
그는 도피 생활 중 첫아들의 출생도 보지 못한 채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감옥이라! 행정적으로는 그 이름도 거룩한 ‘교도소’이지만 감옥은 현세에서 체험할 수 있는 연옥(煉獄)의 다른 이름쯤 되는 것은 아닐는지. 핏덩어리 자식을 세상에 놔둔 채 잡혀온 무기수(無期囚)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바로 연옥일 터이다. 권력에 의해 그 연옥을 경험하고 그곳에서 ‘생명을 깨달은’ 사람은 인생을 말할 수 있다. 그가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대화의 끝머리에 그에게 그의 개인적 삶과 보편적 의미로서의 인생에 대한 생각을 물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가족의 소중함을 말했다. 고통을 감내해준 아내와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했는데도 이제 제 몫을 하고 있는 자식들이 고맙고 대견하다고 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말이 잠겼다. 그는 지난 삶에 대해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반드시 그렇게 사활을 걸지 않아도 됐을 텐데…’라고도 했다. 그의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후회와 회한의 의미는 어떻게 다를까를 생각했다. 그는 이어 ‘이제는 개체가 중요하다’고 했다(그가 말한 개체는 국가 혹은 민족이라든지 집단 혹은 조직 등과 대칭되는 의미로서의 개인을 뜻하는 것으로도 이해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의 진솔한 ‘고백’을 대담의 결론으로 수용했다. 그리하여 시인으로서가 아닌, 투쟁가로서가 아닌, 사상가로서가 아닌 개인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김지하를 내 의식에 새롭게 각인했다고 말할 수 있다. 괜한 감상인가. 웃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날 나는 분명 ‘인간 김지하’를 만나고 왔다. 그는 따뜻했다. 장황하게 적은 이 글에서 내가 독자 여러분에게 기쁜 마음으로 전하고자 한 것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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