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잃은 호남 "거기 누구 없소?"
  • 광주, 이진상(언론인) ()
  • 승인 2007.01.3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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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통합 신당에 '전략적 투표' 가능성 높아...표심 산산이 흩어질 수도

광주·이진상 (언론인)

 
"누구 밀어줄 사람이 있어야 밀든지 말든지 하제. 고건도 없고. 근다고 열린우리당 사람들이 될 성 부른가.”  호남의 정치 1번지 광주시 동구 금남로 뒷골목 소줏집에서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고건 전 총리의 대선 불출마에 서운함과 허탈감이 묻어 있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앞으로도 그랄랑가. 똑 부러진 사람이 나오면 화끈하게 밀어 부러야제.” 말을 이어받은 다른 50대는 앞으로 정치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면서 다시 한번 화끈하게 밀어야 한다고 서너 번을 강조했다. 다시 소주잔이 오갔다. “근디 누가 나올랑가 몰라. 할 만한 사람은 눈 씻고 봐도 없드랑게. 환장할 노릇 아니여….”
호남의 바닥 민심은 조용히 정치권을 응시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새판 짜기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박근혜 전 대표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소란하지 않은 침묵으로 되새기고 있을 뿐이다. 겉으로야 마치 유행가마냥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보이지만, 육중한 민심의 배는 ‘침묵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36년 동안 호남 사람들에게는 꼭 찍어야만 할 후보가 있었다. 1987년 직선제 이후로는 더 강렬했다. 그것이 호남의 한이든, 지역 감정이든 상관없었다. 김대중 ‘선생님’은 호남의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출마했던 13·14·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광주 득표율은 평균 94.9%였다.
김대중 정부 5년이 흐르고 다시 호남민들은 노무현 후보에게 94.6%(광주) 몰표를 안겨주었다. 노후보는 이 지역 사람들만이 가슴으로 아는 ‘광주 정서’ 그 자체였다. 그렇게 10년 세월을 보냈다. 호남 사람들은 다시 2007년 대선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과 전혀 다른 정치 지형도가 그려지고 있다. 광주 남구의 한 사회단체 대표인 민판기씨(51)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 세력이 민주당인지, 열린우리당인지 헷갈리고 있다. 1987년 이후 20년 동안 호남을 확실하게 대표하는 정당이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의 정당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민대표의 말대로 현재 호남 정치에는 세 가지가 없다. 호남의 유력 대선 주자가 없고,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도 보이지 않고, 정치권과 진보 개혁 진영의 끈끈한 연대도 사라졌다. 대선 국면에서 호남은 텃밭 정당의 깃발 아래 ‘마음이 통하는’ 후보를 확실하게 지지했다. 여기에 진보 개혁 진영의 적극적 지지는 호남 몰표의 보이지 않는 동력이었다. 언론은 이를 전략적 선택이라는 정치적 수사로 표현했다.
양동시장 상인 이휴상씨(37)는 “고건 전 총리를 고향 사람(전북)이라고 지지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있어야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분이 갑자기 중도 하차해버려 비빌 언덕이 없어져버렸다”라고 말했다. 
고건 전 총리의 하차 이후 호남 표심은 정밀한 분석이 불가능할 정도다. 정치적 공황이니, 패닉이니, 진공 상태니 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문화일보 1월16일자 여론조사에서는 비록 오차 범위 이내이지만 한나라당 지지도가 가장 높게 나오기도 했다. 한나라당이 14.7%, 열린우리당 14.5%, 민주노동당 13.9%, 민주당 11.5%였다. 1월17일 조선일보·한국갤럽 조사에서는 호남 지역의 한나라당 지지도가 20.6%, 열린우리당 20.7%를 기록했다.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고 전 총리의 애매한 행보에 지치고, 돌발적인 대권 포기 선언으로 상심한 호남 표심이 “될 사람 밀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교사인 김은순씨(41)는 “무조건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 후보를 찍어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동료들은 확실한 비전도 제시하고 경제도 살릴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라고 전했다.
고건 전 총리의 공백과 진공이 던져준 호남 표심의 파편으로 이해할 만하지만, 이 경향이 계속될지는 미지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전남의 한 지자체 단체장은 “범여권 진영이 통합신당을 성공적으로 창당하고, 범국민적인 관심 속에 경쟁력 있는 대선 후보를 만들어내면 광주·전남 지역민들은 다시 뭉칠 것이다. 하지만 범여권 후보가 약해 보이면 호남 표심은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력한 대선 주자가 없는 호남의 정치 상황에서 호남 표가 ‘갈 곳을 잃을 것’이라는 견해와 ‘어딘가에 정착할 것’이라는 전망이 팽팽하게 맞서는 형국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한나라당에 대한 호남민의 시각이 부드러워지고 더 이상 몰표와 전략적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반대편은 두 번의 정권 창출 경험을 가진 호남 표심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으며 새로운 정치 세력이 태동하면 언제든지 결집할 것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호남 표심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라는 예측은 범여권 진영의 판짜기가 어떻게 지역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관측은 호남민들이 범여권의 통합신당에 50% 이상의 기대감을 표시하는 여론조사 결과에서 힘을 얻고 있다.


진보 개혁 세력 지지 없는 통합신당은 모래성


 
광주경실련 김재석 사무처장은 “한나라당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반대편 세력에 관심과 힘을 모아주지 않겠느냐”라고 전망했다.  범여권의 통합신당이 호남에 착근하기 위해서는 지역 내 진보 개혁 진영의 지지라는 필요충분 조건을 요구한다. 지난 15·16대 대선에서 정치권과 재야 세력의 유기적 결합이 몰표라는 형태로 표출된 점에 비추어볼 때, 시민사회 세력의 일정한 동참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특히 호남권 진보 세력은 1970년대 반유신 투쟁과 5·18 광주민중항쟁을 자양분으로 삼아 높은 도덕적 우월성과 정치적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진보 진영의 모임체가 바로 ‘창조한국 미래구상’이다. 전국적 조직인 이 모임체에 광주·전남에서는 발기인 형태로 18명이 참여하고 있다. 주요 인사는 김성종 광주시민단체협의회 대표, 김용채 조선대 이사장, 김종현 전남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박경린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고문, 서정훈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사무처장, 윤장현 우리민족돕기 광주전남 대표, 임낙평 광주환경운동연합 상임집행위원장 등이다.
김성종 광주시민단체협의회 대표는 “연말 대선에서 수구 보수 세력의 집권이 현실화한다면 우리나라 민주주의 퇴행과 사회 양극화의 고착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진보 개혁 진영이 대안적 정책과 비전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제공하고, 나아가 대선 국면에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진보 개혁 진영이 정치권과 어떤 연대 전술을 구사할지는 미지수다. 다만 여권의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경선제) 과정에서 진보 진영의 참여가 가능하고, 반 한나라당 전선을 공약수로 삼는다면 지역 진보 진영의 보폭은 넓어질 것으로 예견된다.
하지만 광주의 번화가 충장로에서 만난 40대 샐러리맨은 대선에 관한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먹고살기 바쁜데 정치에 신경 쓸 틈이 있느냐”라는 힐난성 답변만 돌아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4년 연임 개헌 제안과 고건 전 총리의 전격적인 불출마 선언, 열린우리당의 탈당 등 호남과 인연을 맺은 정치권이 요동치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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