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이는 여인들
  • 이주영 편집위원 ()
  • 승인 2007.01.1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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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으로 활약하는 여성 정치인 5인의 '삶과 도전 그리고 미래'


어느 페미니스트는 정치란 국민을 행한 사랑의 행위이며 이러한 ‘돌봄 노동’을 하기에는 여성이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나라 안이나 밖이나 소수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던 여성 정치인들이 이제는 국가 최고 의사 결정자로 활약한다. 미국의 힐러리 상원의원이나 라이스 국무장관만큼 전세계 매스컴의 표적이 되지는 않으나 자기 문화권에서 국가 수반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거나 대통령 직에 도전하는 여성 정치인들을 짚어본다.

 

 

■ 아일랜드 메리 매컬리스

미모만큼 아름다운 연설


수천년 동안 영국의 침략을 받아왔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1997년 여자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사상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유럽의 선두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그 덕에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는 영국보다 잘사는 나라가 됐다.
메리 매컬리스(59)는 퀸즈 대학 법대를 졸업 후 변호사가 됐고, 방송기자·TV 시사 해설가와 교수를 거쳐 퀸즈 대학 최초의 여성 부총장에 올랐다. 1997년에는 압도적 표차로 아일랜드 대통령에 당선됐다. 득표율은 58.7%였다.
그녀는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는 인사들의 논리를 가장 싫어한다. 그녀 자신의 역할은 ‘편견에서 벗어나 진실로 가는 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매컬리스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일정을 공개한다. 누구든 대통령을 필요로 하면 찾아간다.
첫 임기(7년)를 마칠 즈음에 그녀의 인기가 너무 높자 야당이 아예 후보를 내지 않았다. 그 바람에 대통령에 무투표 당선됐다. 2004년 후반기 아일랜드가 EU 의장국을 맡았을 때 보여준 탁월한 교섭 능력으로 그녀는 가장 강력한 차기 EU 의장으로 거론되었다.
지난 2005년 3월 노무현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을 국빈 방문했던 그녀는 빼어난 미모에다 클린턴에 비길 만한 명연설과 성실하면서도 활달한 매너로 한국인들을 감동시켰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1시간씩 묵상 기도를 할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한국 방문 중 제주 성이시돌 피정 센터 및 서울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부에서 활동중인 아일랜드 선교사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이들의 노고를 격려했었다.
재취임사에서 그녀는 “나를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일은 아일랜드 국민들의 몫이며, 나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권능이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 칠레 미첼 바첼레트
중남미의 가치 있는 지도자

 


오랜 군부독재 이후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사회적·경제적 불안정을 겪은 칠레의  좌파 출신 여성 대통령인 미첼 바첼레트(55).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에 따르면 그녀는 중남미 18개국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브라질 룰라 다실바 대통령에 이어 ‘가치 있는 지도자’ 2위에 올랐다.
바첼레트 정부는 최근 보수파들의 맹공격을 감수하며 여성들이 공공 의료기관에서 무료로 (사후) 경구 피임약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긴급피임 계획B’를 도입하였다. 미혼모·이혼녀 경력을 가졌고 수년간 소아과 및 공중보건의를 지낸 바첼레트였기에  ‘14세 이상이면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도 피임약을 처방받을 수 있다’는 계획을 도입한 것이다. 18세 미만 미성년자 출산율이 15%에 달하고 출산 이후에도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는 칠레의 현실을 감안한 조처이다.
가톨릭계는 긴급회의를 열어 “전체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조처이며, 낙태를 조장하는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보수 세력이 증오하는 모든 ‘죄악’을 대표하겠다”라고 한 그녀의 대통령 당선 소감에 비추어 ‘긴급피임 계획B’를 둘러싼 논란은 1라운드에 불과한 듯 보인다.
바첼레트는 1951년 고고학자인 어머니와 공군 장성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아옌데 대통령 통치 시절에 의과대학을 다니며 청년동맹 리더로 활동했다. 1973년 피노체트 장군의 구데타로 그녀의 아버지는 체포되고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해 3월 옥사했다. 그녀 자신은 당국의 수배자인 친구를 자신의 아파트에 숨겨주다가 1975년 1월 체포되어 고문을 받는다. 다행히 3주일 만에 풀려나 호주를 거쳐 독일에 도착,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 의대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칠레 출신의 건축가를 만나 두 딸을 낳았고 1979년 귀국, 1982년에 외과전문의가 되어 공중보건의를 신청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거부당했다. 미첼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다양한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그의 정치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 비상사태에 의한 피해아동 보호단(PIDEE)’ 활동이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칠레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민·군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한 바첼레트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국립정치·전략연구아카데미에서 군사전략 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에는 대통령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워싱턴의 미주 안보학교에서 1년간 수학했다. 2000년에 보건장관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민간인 여성으로서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그녀의 국방장관 취임은 군사 잔재 청산과 민·군 관계 개선이 최대 정치적 쟁점이던 시기에 국민 화합의 상징적인 일로 떠올랐다. 스스로 성격이 매우 강하고 완고한 편이라고 평가하는 그녀는 카리스마가 넘치고 서민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에 따른 시장의 강화는 시민들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정부의 사회 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 독일 앙겔라 메르켈
영향력 있는 여성 1위

 

 


마거릿 대처에 비유되며 2005년 11월 화려하게 등극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52). 그간 이라크 전쟁을 둘러싸고 최악이었던 대미 관계를 개선하고 러시아와 에너지 협력 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경제성장률도 두 배 이상으로 올랐으며 실업률도 1년 만에 12%에서 9.8%로 떨어졌다. 정책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괜찮은 편이다.
독일 최초의 ‘오시(Ossi)’(동독 출신을 얕잡아 부르는 말) 여성 총리인 메르켈은 원래 1954년 7월 서독 땅인 함부르크에서 출생한 직후 목사 아버지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해 줄곧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 성장했다.
메르켈은 집과 집 밖의 서로 대립적인 두 세계 사이에서 자라났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유년기의 성장 배경이 특유의 실용주의적인 성격을 각인케 한다. 유난히 언어에 소질이 있었음에도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해야만 했던 메르켈은 통일 과정에서 정치에 입문하는데, 타고난 언어적 감각으로 정치 입문 몇 달 만에 동독의 마지막 정권인 드메지에르 정권에서 정부 부대변인이 된다. 독일 통일 이후 콜 수상의 총애를 받아 여성부장관과 환경부장관을 역임하고 콜 퇴진 이후 기민당의 당수가 되어 정치 입문 후 불과 십수년 만에 독일 제1 정당의 총리 후보로 등극하여 2005년 11월 기민당·기사련과 사민당 간에 이뤄진 대연정에서 총리에 오른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해 9월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을 제치고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으로서는 단호함과 뛰어난 적응력으로 동·서독 정치적 통합 과정의 상징적 마스코트였던 그녀가 국가 CEO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에는 능숙하지 않은 듯하다. 협상을 오래 끌고, 실수할까 봐 메모를 보면서 발언하는 신중한 스타일이 미디어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중 정치의 시대에는 감점 요소로 작용해 여론조사 때 그의 소속당인 기민당의 지지도가 낮은 것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 프랑스 세골렌 루아얄
엘리제 궁에 입성할까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엘리제 궁(프랑스 대통령의 관저)이 몇 달 후에는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모시게 될지도 모른다.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정치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가 상당히 저조했다. 경제적인 참가 및 문화, 교육 영역에 있어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프랑스 여성들이 앞서 있지만, 유독 정치 영역에서는 상당히 위축되어 있다.
지난해 11월 제1 야당인 사회당은 2007년 대통령선거 후보로 여성 정치인 세골렌 루아얄(53)을 선택했다. 루아얄은 여론조사에서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의 대선 유력 후보인 니콜라 사르코지 현 내무장관과 대등한 지지도를 기록해 오는 4월 대선에서 접전이 예상된다.
그녀는 기존 정치인과는 달리 인터넷을 적극 활용해 대중과 접촉하는 참여민주주의 방식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기존층으로부터 실력 없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인이라는 비판도 나오는 형편이다. 특히 외교 안보 분야에서 국정 운영 능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루아얄은 프랑스 정계를 지배해온 남성 정치인과 대비되는 여성 특유의 강점을 지니고 있다. 세련된 외모와 네 자녀의 어머니로서 성공적인 가정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한몫 했다. 루아얄은 국립행정학교 동기인 올랑드 사회당 제1서기와 정식 결혼이 아닌 파트너 형태로 살며 전부인 소생의 네 자녀를 키우고 있다.
프랑스의 차기 대통령 선거 1차 투표는 오는 4월22일 실시되며 1차 투표에서 당선자를 가리지 못할 경우 상위 득표자 2명에 의한 결선 투표를 5월6일 치른다.  


라트비아 비아라 비케이야르
유엔 총장은 안됐지만 …

 


영향력 면에서는 주요 국가에 미치지 못하지만 북구에서는 일찌감치 여성을 국가 수반으로 모셨다. 인구가 10만명밖에 되지 않는 아이슬란드의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는 세계 최초 민선 여성 대통령이며 1984년, 1988년, 1992년에도 연이어 당선되어 총 16년 동안 대통령을 한 최장 집권 대통령이다.
지난해 가을 인구 2백33만명, 국토 면적 6만4천km2의 해안국 라트비아의 비아라 비케이야르 대통령(70)은 발트 3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유엔 사무총장 직을 놓고 반기문 후보와 경합을 벌였다가 반장관이 총장으로 결정되기 하루 전인 10월8일 공식 사임 의사를 발표했다. 이것은 작은 해안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을 자극하는 사건이었다. 그녀는 유일한 여성 후보이자 유일한 비아시아권 후보이기도 했다.
출마 포기 선언 후 영국 주간지 <더 옵서버>와 가진 인터뷰에서 비케이야르는 “유엔은 ‘늙은 남자’들만이 일하는 네트워크가 되어버렸고, 유엔의 최고 직을 여성이 수행해야 하는 시간이 이미 확실히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엔 최고 직 자리에 여성이 필요한 시간은 60년이 될지 6백년이 될지 잘 모르겠다”라고 덧붙였다.
비케이야르는 1937년 12월 리가에서 태어나 러시아의 점령을 피해 독일을 거쳐 캐나다로 이주하며 살았다. 캐나다 토론토와 몬트리올에서 심리학과 민속학 등을 전공한 후 문학 분야에서도 연구 결과를 쌓아가며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실험심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자서전 3권을 포함해 도합 9권의 책을 썼다.
1998년 라트비아에 돌아와 새로 신설된 ‘라트비아 인스티튜트’의 소장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해 대통령에 당선되어 1차 임기를 마친 후 2003년 다시 재선됐다.
그녀는 사회적 사안이나 윤리 문제, 민주주의에 대한 통렬한 발언으로 2005년 한나 아렌트 상을 수상했다.
가족으로는 반세기 동반자이며 정보학 교수인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딸 하나씩 두고 있다. 아들은 리가에서 기자로 일하며 딸은 아이슬랜드투자청 런던사무소 소장으로 근무한다.  

이주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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