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전쟁사를 알면 평화학이 쉬워진다
  • 이문재 (시인) ()
  • 승인 2007.01.02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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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책]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전쟁과 평화>

 
전쟁과 전쟁 사이가 평화인가, 평화학이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설계 지침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아직도 평화에 대한 정의는 애매하고, 그나마 평화에 대한 관심도 크지 않다. 평화는 이상주의자의 기도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인간과 전쟁, 그리고 국가에 대한 고정 관념이 완강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온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전쟁과 평화>(장혜경 옮김, 웅진지식하우스)는 전쟁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평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전쟁과 인간, 전쟁과 종교, 전쟁과 정치, 전쟁과 국가, 전쟁과 무역 등 전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류의 역사를 조감하는 저자의 시각은 단호하고 또 일관되어 있다. 전쟁은 유전자의 지시를 받는 본능적 행위가 아니다. 자연의 생존 투쟁과 인간의 전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냥을 전쟁의 기원이라고 규정하고, 인간의 커다란 두뇌 즉 지능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인간을 위한 전쟁은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널리 알려진 서양의 그릇된 타자 인식이 전쟁의 양상을 잔혹하게 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서부터, 19세기 식민지 쟁탈전이 모두 백인 우월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전쟁은 인간의 폭력성 때문이 아니고 사회나 국가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운명을 종교나 독재자, 일부 지배 계층에 맡겼을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손자병법>과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은 유럽의 전쟁관과 매우 다른 것이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성경 이래 종교와 손을 잡고 십자군 전쟁, 30년 전쟁으로 이어졌다면, 동양의 전쟁은 도교나 불교와 손을 잡으며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저자 슈타군은 비교한다. 중국의 전쟁론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상의 전략이라고 보았다.

세계 전쟁사는 전면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슈타군은 30년 전쟁(1618~1648)이 유럽 최초의 전면전이었으며, 20세기 들어 세계 제1, 2차 대전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고 보았다. 현대 전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클라우제비츠에 의해 전쟁은 무자비한 전면전으로 돌입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주체가 국가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켰다. 그리고 전쟁은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동원되는 ‘사회 활동’이라고 보았다.

전쟁사를 평화학의 반면교사로 설정

 
이 책은 평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책의 9할 이상을 전쟁의 역사에 할애하고 있다. 전쟁사를 이제 막 고개를 드는 평화학의 반면교사로 설정한 것이다. 저자는 핵전쟁과 같은 전면전 못지않게 테러(비대칭 전쟁)와 내전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나아가 에너지 고갈, 식량 문제, 생태 환경 위기가 새로운 지뢰밭으로 등장해 있다고 강조한다.

전쟁에 대한 오해, (국가 사회주의를 불러온) 사회 생물학이 오도한 인간의 폭력성이 평화에 대한 희망을 가로막고 있다. 저자는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첫걸음은 민주주의와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전쟁은 국가가 저지르는 최악의 폭력이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평화학의 첫 페이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나와 그들’을 ‘나와 우리’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증오와 복수를 타협과 화해로 전환시키는 교육을 의미한다.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상적인 평화 연습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성전(聖戰)은 없다. ‘성스러운’ 것은 오직 평화밖에 없다는 인식이 자리잡을 때, 남성이 주도해온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슈타군은 결론짓는다.

이 책을 덮으려니, 몇 권의 책이 떠오른다. 요한 갈퉁의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하영선 편 <21세기 평화학>, 임영신의 <평화는 나의 여행> 등이다. 오래된 미래 혹은 계속 유예되고 있는 미래인 평화학, 평화운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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