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포기와 북·미 수교 통 큰 거래 이뤄질까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12.04 10: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힐 차관보, 부시-김정일 정상회담도 제안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베이징 북·미 회담(11월28~30일)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가 매우 혼란스럽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예상치 못한 통 큰 제안을 던졌다’고 하기도 하고, ‘북한이 회담 날짜를 합의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이 실패했고, 미국의 대북 정책도 딜레마에 빠졌다’고 하기도 한다.

과연 ‘회담 날짜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협상이 실패했다’고 규정할 수 있을까. 김계관 북한 외무부 부상은 왜, ‘미국의 통 큰 제안’에도 불구하고 회담 제개 일시에 합의하지 않았을까. 베이징 북·미 회담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문제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계관 부상이 처음부터 ‘날짜’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듣기 위해서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사정에 정통한 베이징 관계자가 전한 바에 의하면, 오히려 정반대였다. 김부상이 지난 11월28일 미국측 협상 파트너인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만나기 위해 베이징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미 그의 흉중에는 6자회담 재개 일자와 종료 일자 및 회담 기간 등에 대한 평양의 분명한 지침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12월 초에서 중순 사이에 시작해 중순에 종료하고 기간은 3박4일 정도’였다는 것이다.

막상 힐 차관보와 이틀에 걸쳐 많은 얘기를 나눠놓고도, 그는 복안을 꺼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가서 다시 협의해 알려주겠다고 지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것이다. 또한 김부상이 이처럼 황망하게 돌아간 뒤에도 미국측은 12월 중순에 6자회담이 열릴 것이라며 한껏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김부상이 회담 일자를 꺼내지 않은 것은 ‘힐 차관보와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라든가 하는 통상적인 회담 무산 사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미국이 너무 세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놀래서’라는 것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지난 11월7일 중간선거 후 말로만 듣던 ‘부시 행정부의 변화’를 힐 차관보를 통해 확인하고는 기존에 수립했던 회담 전략을 재고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황망하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국내외 대북 소식통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북한은 12월에 6자회담이 재개될 경우, 이번 회담의 모든 초점을 ‘핵 보유 굳히기’에 맞추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즉 한·미·일이 ‘북한의 핵 보유 불인정 및 핵 포기’를 압박해온 데 대해, 북한은 ‘핵실험을 마친 엄연한 핵 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라’는 데 초점을 맞추려 했던 것이다.

북한이 이처럼, ‘핵 보유국 인정’을 1단계 협상 목표로 세운 배경에는 대미 협상의 전과정에 대한 북한 내부 전략가들의 현실적 고려가 작용했다고 한다. 즉 현재처럼 미국이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어정쩡한 상황에서는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 포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 등 북한이 생각하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어렵더라도 핵 보유국 지위를 일단 굳혀놓아야 미국과 주고받을 것이 명확해지고, 궁극적으로는 핵을 포기할 테니 북·미 수교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라이스 평양 방문이 북·미 관계 개선 신호탄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은 “그동안 핵 보유 문제에 대해 북한측은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다’는 메시지와 함께 ‘핵은 포기하려고 만든 게 아니다’는 지난 11월13일 강석주 부상의 발언처럼, 상호 모순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 배경에 바로 이같은 현실 인식과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이같은 ‘선 핵 보유 인정, 후 북·미 담판’ 전략에 입각해 6자회담 전략을 수립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6자회담을 재개하고, 핵 보유 원칙을 부각하며 회담을 질질 끌고 가다 보면 내년 여름께면 미국이 어쩔 수 없이 수용할 것이고, 그러면 그때 가서 미국과 담판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같은 협상 전략에 입각할 경우에도 6자회담을 12월 중에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매뉴얼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계관 부상이 일정 협의도 없이 서둘러 돌아간 것은 바로 힐 차관보가 북한이 설정한 단계를 뛰어넘는 ‘통 큰 제안’들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북·미 수교가 아니냐, 그것을 위해 핵 보유 후 포기라는 식으로 돌아가지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하자는 식의 압축적 태도로 밀고 들어와 혼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베이징 소식통의 얘기를 종합하면, 회담 초기에는 김계관 부상이 원칙론을 강조하면서 매우 기세 좋게 밀어붙였다. 북한이 이미 핵실험까지 성공리에 마친 핵 보유국이므로 그걸 인정한 토대 위에서 회담을 시작하자며 ‘지침’대로 공세를 펼쳤다. 그런데 힐 차관보가 갑자기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보고 싶어한다.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환경 조성이 필요하지 않겠나’라고 지르고 들어왔다. 힐 차관보는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부시 대통령의 얘기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이건 부시 대통령의 뜻’이라며 10여 차례에 걸쳐 인용 화법을 구사했다.

북한의 단계론적 사고에 의하면 2단계에서 나와야 할 얘기가 초두부터 쏟아지자 이에 당황한 김 부상이  “양 정상 간 만남에 앞서 절차가 필요하지 않겠나. 라이스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역공을 취했다. 라이스 장관의 평양 방문은 북한의 오랜 현안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2005년 5월 북한 외교부의 일군들에게 ‘라이스를 평양에 초청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 라이스의 평양 방문은 곧 미국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할 용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시금석과 같은 것이었다는 점을 미국측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매우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 것인데, 힐은 이에 대해서도 ‘할 수 있고 말고’라며 거침이 없었다. “김부상이 이때부터 매우 혼란을 느낀 것 같다”라고 대북 소식통은 전했다. 눈앞의 회담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담 전략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고, 자기 수준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 힐 차관보는 중간선거 이후 변화된 미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고 한다. 혹자는 “6년 만에 미국이 다시 돌아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클린턴이 방북을 준비하던 그 미국의 모습이 힐의 파격 발언들 속에서 어른거렸다는 얘기다. 9·19 공동성명 이후 6자회담의 협상 틀로 자리 잡혀왔던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 ‘핵 포기를 위한 북한의 선행 조처와 주변국의 보상 조처’니 하는 단계별 협상은 이미 무색해졌다. 물론 ‘6자회담에서 북한이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의 가동을 중단하면 힐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연락사무소 협상을 개시하고, 평양에 연락사무소가 들어가면 그것을 거점으로 북한의 핵 폐기 과정을 본격화한다’는 협상 전략이 기조에 깔려 있기는 했지만, 북한의 반응 여하에 따라서는 몇 단계의 점프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미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한마디로 북한의 핵 포기와 북·미 수교를 정점에 두고, 가능한 한 가장 빠른 길로 가보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공은 평양으로 넘어가 있다. 평양 지도부가 여전히 미국의 의도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결론을 내릴지 두고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북한 핵문제와 북·미 관계의 향방’에 중대 국면이 등장한 것이다. 더 이상 “여러 차례 좋은 기회가 있었으나 놓쳐왔다”라는 평양 내부 실무자들의 한탄 소리가 반복되지 않는 상황이 전개될지 주목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