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지러지 거나 혹은 썰렁하거나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6.11.10 18: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내에도 정보와 재미 담은 ‘전 문 만화’ 등장…작가들, 드라마·MLB 등 비틀고 꼬집어 인기

 
일본 만화는 소재의 전문성에서 남다르다. <맛의 달인> <신의 물방울> <갤러리 페이크>처럼 각각 요리, 와인, 미술품 경매를 소재로 하면서 재미와 정보를 함께 주는 작품들이 많다. 이른바 ‘전문 만화’이다. 한국 만화 가운데에서도 이런 전문 만화가 하나 둘 등장하고 있다. 드라마·영화 같은 대중문화나 스포츠를 소재로 한 전문 만화들이 바야흐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전문 만화를 대하는 독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열광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예를 들어 만화의 소재가 되는 원 작품을 안 본 사람은 만화가가 코믹하게 비틀어놓은 풍자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전문 만화는 마니아적이거나 컬트적이다. <시사저널>은 주목할 만한 ‘전문 만화’를 그리는 3인의 젊은 만화가를 만났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그 전문 만화, <MLB카툰>

만화가 최훈씨(35)는 포털 사이트 네이버(mlb.naver.com)에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그 전문 만화 <MLB 카툰>을 2004년부터 연재하고 있다. 최씨는 이 만화에서 메이저리그 선수를 소개하거나, 팀 전력을 분석한다. <MLB 카툰>을 보고 있자면, 그가 웬만한 야구 해설가보다 메이저리그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포츠 케이블 채널에서 최훈씨에게 야구 해설을 부탁했을 정도다. 지난해 4월에는 뉴욕 타임스에 <MLB 카툰>이 소개되기도 했다.

최훈씨는 일본에서 만화와 메이저리그를 배웠다. 대학 시절, 단편소설로 통신문학 계간지 <버전업>에 등단했던 최씨는 대학 졸업 후에 무작정 일본행을 감행했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대학과 만화학원의 중간쯤 되는’ 만화학교에 입학했고, 일본 사이타마 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예술학을 공부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4년 동안 일본 생활을 할 때, 유일한 벗이 메이저리그였다. 서점에서 갖가지 메이저리그 관련 잡지를 사보고, 집에서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았다.

귀국 후 학원 강사를 하던 도중 2002년 <일간스포츠>에 만화를 연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이상무 화백이 골프만화를 연재하기로 했는데, 그 만화를 연재하는 시점이 한 달 정도 늦어지면서 ‘땜방 만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덕분에 직장인 만화 <하대리>를 연재하게 되었는데, 독자들 반응이 괜찮았다. 애초 한 달 동안 연재하려던 작품을 3년 넘게 연재했다. 최훈씨가 드디어 프로만화가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

프로 만화가로 인기를 끌게 되면서, “만화를 그리면서 생긴 스트레스를 만화로 풀자”라며 시작한 것이 <MLB 카툰>이었다. 메이저리그를 그린 만화를 몇몇 동호회에 올렸더니 야구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내처 네이버 메이저리그 페이지에 연재하게 되었다. 최씨는 “전문 만화는 결국 그 분야를 좋아해야 그릴 수 있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내가 ‘틈새 시장을 찾았다’는 글도 보았는데 그 글을 보고 픽, 웃었다. 틈새 시장을 찾기 위해 야구 만화를 그린 것이 아니고,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 만화를 그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씨가 <MLB 카툰>을 그려 네이버에 올리면 대개 20만~30만명이 본다. 대부분 메이저리그 마니아들이다. 마니아들이 보기 때문에 한 컷 한 컷에 꽤나 신경을 써야 한다.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댓글에서 난리가 난다. 예를 들어 LA 다저스 팀의 유니폼은 앞쪽(빨강)과 뒤쪽(파랑)의 번호 색깔이 다르다. 그런데 최씨가 실수로 뒤쪽에 있는 번호를 빨강으로 칠했더니, ‘등번호 색깔이 틀리다’라고 항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최씨는 경기 데이터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한번은 경기를 그리면서 엑스트라 격으로 왼손 투수가 던지는 장면이 들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그 경기에는 오른손 투수만 등판했다. 왼손 투수는 나온 적이 없다. 누구냐? 그 왼손 투수는?’ 이처럼 “전문 만화는 마니아가 인정해야 일반인들도 인정한다”라는 것이 최씨의 말이다.

최씨는 야구 만화뿐만 아니라 삼국지를 소재로 한 <삼국전투기>도 일간스포츠에 연재하고 있다. 삼국지도 마니아들이 많다. 그래서 그는 <정사(正史) 삼국지> 일본어판을 구해다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삼국지> 마니아들이 만화를 유심히 보다가 ‘정사’와 다른 내용이 나오면 곧바로 댓글 포화를 퍼붓기 때문이다.

최훈씨는 현재 또 다른 야구 만화를 준비하고 있다. 프로야구단을 경영하는 야구단장(GM)이 주인공이다. 최씨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제너럴 매니저는 전문직이다. 야구 장면은 별로 안 나오고, 야구단장이 구단을 어떻게 경영하는지에 집중하는 색다른 야구 만화를 구상 중이다”라고 말했다.

 
TV와 영화를 리뷰하는 <올드독>

‘올드독’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캐릭터이다. 이 15살 먹은 ‘건방진’ 개는 TV 웹진인 <매거진t>에서 TV를 보고, 온라인 서점인 예스24에서 영화를 리뷰한다. 세상살이에 달관한 듯한 자세로, 잔잔한 느낌으로. 올해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카툰 부문 상을 수상했으니, 상복이 좋은 편이다.

만화가 정우열씨가 창조한 올드독은 처가에 있는 ‘15살짜리 건방진 개’에서 성격을, 얼굴 모양은 집에서 기르는 폭스테리어에서 따왔다. 동물 캐릭터를 내세워 도시 생활에서 겪는 일상적 경험과 생각을 간결한 그림체로 표현했다. 처음에는 인터넷 블로그(blog.naver.com/hhoro)에만 올렸는데, 차차 인기를 끌어 책으로 출판되었다.

정우열씨는 원래 시사만화가 출신이다. 대학 2학년 때부터 학보사 만평을 그렸고, 대학교 3학년 때 <일요신문>을 시작으로 각종 매체에 시사 만화를 기고했다. 그동안 그의 만화가 실린 매체는 한겨레·중앙일보·일요신문·신동아 등 여럿이다.

그러다가 2004년 4월에 시사 만화에서 ‘생활 만화’로 방향을 확 틀었다. 나름으로 잘나나는 시사만화가였는데 왜 그랬을까? “책을 내고 싶었는데, 시사 만화는 유통 기간이 짧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더욱이 그는 시사 만화처럼 굵직굵직한 소재보다는 잔잔한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정우열씨는 “나는 ‘사람들은 왜 화장실에 갔다 온 후에 손을 씻지 않을까?’ ‘왜 길거리에서 걸으면서 담배를 피워 뒷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이런 작은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한겨레>에 시사 만화를 그리는 장봉군 화백에게 e메일을 보냈다. 생면부지의 장화백이 준 조언이 ‘생활 만화’였다. 그래서 지금도 정우열씨는 “장봉군 화백이 고맙다”라고 한다.

최훈씨가 좋아하는 야구 만화를 그리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처럼, 정우열씨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만 소재로 삼는다. <연애시대> <여우아 뭐하니> <환상의 커플> <위기의 주부들> <CSI> 등등. “시사 만화는 싫은 것,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비웃고 풍자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내가 봐서 좋았던 작품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싶다”라고 정씨는 말했다.

 
만화 소재가 되는 영화는 상업성이 강한 작품보다는 예술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영화들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나 <귀향> 같은 영화들이다. 비흥행작일 때는 리플이 잠잠하지만, 그래도 상관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을 그리겠다고 시작한 리뷰 만화이니까.

대학 시절 시네마테크 활동을 했고, 대학을 마친 뒤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던 경력을 지닌 이 ‘생활만화가’는 영화 리뷰 만화를 그리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틈틈이 영화 쪽 일을 한다.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유혹>을 촬영할 때는, 만화가로 나오는 배우 지진희에게 만화 지도를 하기도 했고, 영화아카데미 20주년 행사 때는 디자인과 영화제 트레일러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드라마를 비틀어라, <웁스라마>

김문희 씨(27)가 드라마 잡지 <드라마틱>에 그리는 드라마 패러디 만화 <웁스라마>는 ‘컬트 만화’이다. 독자나 네티즌 반응을 키워드로 정리하면, ‘열광’과 ‘썰렁’으로 정확히 나뉜다고나 할까. 소재가 되는 드라마를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이라면 ‘김문희식 유머’에 뒤집어지게 되고, 드라마를 안 본 사람이라면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김씨는 “내 유머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유머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 유머가 마니아틱하구나라고 느낀다”라고 말했다.

<웁스라마>를 그린 김씨는 중앙대 사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대학생으로 신진 만화가이다. 놀랍고 황당할 때 쓰는 ‘웁스’와 ‘드라마’를 합성한 제목의 만화 <웁스라마>가 데뷔작이다. 그동안 드라마 50여 편을 패러디한 만화 작품을 발표했다.

김문희씨는 어릴 때부터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21살 때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만화가 강도하씨 강의를 들은 것이 인연이 되어, 강씨가 운영하는 만화 웹진 ‘악진’에 만화를 올리기도 했다. <드라마틱>에 이 무명의, 하지만 재기 발랄한 만화가를 소개한 것도 강도하씨였다.

김씨는 만화를 그리기 전에 드라마를 몰아서 본다. 작품 선택 기준은 세 가지다. 어느 정도 본궤도에 오른 작품, 시청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작품, 인기 작품. 종영된 작품이나 인기가 없는 작품은 되도록 피한다. “반응이 없으니까.” 드라마를 보고, 시청자 게시판 서핑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김문희식 유머는, 한 컷의 대사나 지문에 나타난다. <주몽>의 잇따른 납치극 설정을 비꼬는 것이나, <소문난 칠공주>를 패러디하면서 ‘남달구 천사’를 등장시킨 컷들은 정말 ‘웁스’하게 만든다. 백문이 불여일견. ‘주몽’ ‘소문난 칠공주’ 마니아라면 꼭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썰렁하거나, 포복절도하거나. 둘 중 어느 쪽이냐에 따라 자신의 만화 취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