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와 권태응의 인생
  • 도종환(시인) ()
  • 승인 2006.11.0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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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하 전 대통령은 경기고 33회 졸업생이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경기고 출신이다.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했으니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대통령이다. 경기고 33회는 인재들이 많다. 최규하 대통령 말고도 이영섭·민관식 등 법조계와 국회의 최고 자리에 오른 사람들도 있다. 그 33회 동기생 중에 권태응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제일고보 시절부터 일찍 민족의식에 눈떴다. 일본인 교사들이 “조센징인 주제에 건방지다”라고 차별적인 언행을 일삼으면 저항했다.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U.T.R구락부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등산 모임을 하면서 ‘등산일지’라는 모둠 일기를 쓰고 돌려보며 사상과 의식을 맞추어가려고 했다. 한번은 졸업 앨범 기증 문제로 학급 회의를 하다가 “우리가 졸업하게 되는 것은 천왕 폐하의 홍은이 아니냐”라고 하는 앨범 위원들을 집단 구타하고 이로 인해 U.T.R구락부원 여덟 명은 보름간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런 동기생들 사이에서 최규하는 강원도에서 올라온 말 없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1937년 졸업 후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난다. 권태응은 와세다 대학으로, 최규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한다. 권태응은 동기생 염홍섭 등과 함께 도쿄에 유학 온 20여 명의 동기생을 모아 33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한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회합을 갖고 주제를 달리해가며 토의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조선의 식민지 경제와 자본주의의 결함을 분석한다든가, 제국주의 열강이 치르고 있는 침략 전쟁의 성격을 파헤치며 일본이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내는 등 상당한 수준의 정치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유학생들이 사치에 흐르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경계하거나 파쟁과 대립을 벗고 단결해야 한다든가,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통해 조선 농민을 지도해야 한다는 것 등을 학습했다고 경찰 조서는 전한다. 물론 최규하라는 이름은 이 동기생들의 비밀 결사 모임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권태응은 스가모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다 폐결핵 3기의 몸이 되어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된다. 동기생 홍순환과 함께 출소한 권태응은 도쿄 시에 있는 제국갱신회(帝國更新會)에 거주지를 제한당하고 와세다 대학에서는 1940년 4월 퇴학 처분을 받지만 최규하는 다음해에 대학을 졸업한다. 그리고 최규하가 친일 고위관료 양성 기관인 만주 대동학원에 입학할 때 권태응은 인천 적십자요양원에 입원한다. 거기서 생사의 기로를 헤맬 때 최규하는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만주국 정부 관리가 된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했고 식민지 체제야말로 모순의 근원이므로 식민지 체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믿었던 권태응은 병든 몸을 추스르며 야학을 하고 농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 어려서부터 말이 없고 착실하게 공부만 했으며 어떤 체제든 동화되어 거기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며 사는 것이 몸에 배어 있던 최규하는 관료로서 승승장구한다.

일제의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없던 권태응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이들을 위한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로 잘 알려진 <감자꽃>이라는 동시집을 내고 3백여 편의 미발표 동시 원고와 농민 문제를 다룬 단편소설을 남긴 채 서른네 살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최규하는 식민지 체제, 광복 공간, 분단 체제와 독재 체제 아래에서 36년간 관료로서 성실하게 생활하며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거쳐 10·26 이후에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윤동주와 정일권이 동창이면서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갔듯 권태응과 최규하도 다른 인생의 길을 살다 갔다. 권태응은 선반의 널빤지를 뜯어 거기에 묶어 야산에 묻혔는데, 최규하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모셨다. 지난해 광복 60년 기념식장에서 권태응이 독립운동가로 표창받는 것을 최규하도 알았을 것이다.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을 보고 뭐라고 한 줄 써놓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권태응이라는 이름조차 잊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식이나 젊은이들에게 어떤 인생을 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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