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차기 사무총장이 통일교 신자라고?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10.3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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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세력들, 영문 이름의 ‘Moon’ 보고 의심

 
지난 10월13일 유엔(UN) 총회에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추인된 직후 유엔 출입 기자단과 기자 회견을 가졌다. 이때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가 반기문 장관에게 종교적 견해를 묻는 일이 벌어졌다. “당신은 신을 믿는가? (만약 종교가 있다면) 신과 종교가 당신의 의사 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이에 대해 ‘기름 장어(곤혹스러운 질문을 이리저리 잘 빠져나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의미)’라는 별명을 가진 반기문 장관은 “차기 사무총장으로서 나는 특정 종교나 신에 관한 견해를 이 자리에서 밝히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훗날 이 질문에 대해 사적으로 답할 때가 있을 것이다”라며 은근슬쩍 넘어갔다.

하지만 기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종교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요즘 유럽에서는 종교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놓고 볼 때 종교와 정치에 대한 당신의 견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역시 반장관의 답변은 두루뭉수리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종교와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문화와 역사와 이념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유엔이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대화를 위해 각종 회의나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이유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나는 다른 문화 사이에 다양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반기문 차기 유엔 사무총장은 특별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어머니가 불교 신자라는 것이 전부다. 무종교인 처지에서 보면 반기문 차기 사무총장의 답변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부 외신들은 이런 답변에 다소 찜찜해했다. 사실 출입 기자단 질문의 진짜 의도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통일교 신자입니까?’라는 것이었다.

차기 유엔 사무총장 선거 기간에 반장관이 통일교 신자냐, 아니냐를 두고 인터넷상에서 논쟁이 뜨겁게 벌어졌다. 물론 영어권 인터넷 사이트에 국한된 내용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종교가 무엇인지 별 관심이 없는 한국 누리꾼들은 반기문 사무총장의 종교에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신의 나라’ 미국을 비롯한 몇몇 서유럽 사람들에게 유엔 사무총장의 종교는 중요한 이슈였다.

유엔 사무총장, 종종 종교적 아이콘으로 등장

‘안티 반기문’ 사이트인 ‘챕터 15’를 비롯해, 각종 음모론 사이트 운영자와 블로거들이 이 문제를 집중 제기했다. 미국의 몇몇 종교계 언론들도 이 의혹에 가세했다. 하지만 반기문 차기 사무총장이 통일교와 관련이 있다는 근거는, 반 차기 사무총장의 이름 마지막 글자가 문(Moon)으로 끝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외신들은 반기문 장관을 표기할 때 ‘Ban Ki Moon’이라고 쓰며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표현할 때는 'Sun Myung Moon'이라고 쓴다. 한국 이름 표기법을 잘 모르고, 한국에 문씨가 40만명도 넘게 산다는 것을 모르는 외국인이 보기에 딱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통일교 신도라는 소문이 나돌았던 해프닝은 우리로서는 잘 이해하기 힘든 서구인들의 유엔과 종교에 대한 잠재의식을 보여준다.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가 집사 역할을 하는 데 불과하고, 유엔 그 자체가 강대국들의 이해를 대리하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함에도, 유엔과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 정부’라는 상징성 때문에 종종 종교적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미국에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가상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가 대표적 사례다.  기독교 근본주의를 바탕으로 팀 F 라헤이와 제리 B 젠킨스가 쓴 이 시리즈 소설은 1996년 첫편이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최소 5천만 질(시리즈)(2004년 집계) 이상 팔렸다.
소설의 내용은 적그리스도(기독교에서 말세에 등장한다는 악마)가 나타나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가 7년간 참혹한 전쟁에 휩쓸린다는 종말론을 담고 있다. 문제는 유엔과 유엔 사무총장이 세계의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니콜라에 카프파티아라는 이름의 루마니아 정치인이 본색을 감추고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된다. 당선된 이후 본심을 드러낸 카프파티아 사무총장은 유엔 본부를 바빌론으로 옮긴 뒤 반미 세계정부를 세운다. 새 유엔 사무총장은 각 국민 국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세계의 왕으로 군림한다. 이 적그리스도 유엔 사무총장의 군대에 맞서 주인공을 비롯한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이 용감히 싸운다. 소설은 전쟁으로 이슬람 세계가 폐허로 변해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황당무계한 내용이지만 <레프트 비하인드>의 반향은 대단했다. 시리즈는 열두 권까지 이어졌고, 시리즈 한 권이 발표될 때마다 뉴욕 타임스·월스트리트 저널·유에스에이 투데이 베스트셀러 목록 1위에 올랐다. 종교 소설계의 <해리 포터>인 셈이다. 소설이 인기를 끌자 같은 제목의 시뮬레이션 컴퓨터 게임, 만화, 영화, 어린이 소설로도 제작되었다. 미국의 내로라하는 CCM(종교음악) 가수들이 소설 중 제12권 ‘고난의 군대’를 주제로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어떤 형태로든 만들면 히트를 치는 대박 아이템이 된 것이다. 이 시리즈는 초판이 나온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국의 스테디셀러 목록에 올라 있을 정도다.

일부 소설이 ‘유엔 사무총장=악마’로 그려

<레프트 비하인드>는 ‘유엔 사무총장=악마’라는 상상력이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보편적 호소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만약 미국 대통령을 악마로 묘사하는 소설을 썼다면 그처럼 엄청난 흥행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의 지식인 슬라보예 지젝은 2004년 11월5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재선 성공을 비평하며 쓴 칼럼에서 <레프트 비하인드>를 언급하면서 ‘우리를 경악시키는 것은 이 소설의 빈약하고 유치한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심각한 종교적 메시지가 대중문화 상업주의의 쓰레기 같은 관습과 결합되었다는 점이다’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이 있었기에 <레프트 비하인드>를 탐독한 미국인들이 반기 ‘moon’ 유엔 사무총장의 탄생에 기겁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반장관이 통일교 신자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 인 이면에는 지난 40여 년간 꾸준히 유엔과 친분을 맺어온 통일교의 움직임과 이를 경계해온 주류 기독교 세력 간의 대립도 한몫 한다.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는 통일교의 교리에 어울리게 통일교는 유엔을 무대로 많은 활동을 해왔다. 통일교 산하 단체들 가운데는 유엔으로부터 공식 NGO 지정을 받은 곳이 많다. 대표적인 통일교 단체 세계평화여성연맹(Women's Federation for World Peace, WFWP)을 비롯해 세계평화가정연합이나 세계NGO연합(WANGO)도 유엔 승인을 받았다. 1999년 2월 창립한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도 유엔 등록 단체이다. 유엔에 등록한 NGO는 미국 뉴욕에 소재한 유엔본부에서 쉽게 행사를 열 수 있다. 통일교를 홍보하는 책자나 사이트를 보면 특히 유엔본부에서 열린 통일교 관련 행사를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2001년 통일교는 뉴욕 유엔본부 회의장에서 대형 합동 결혼식을 열었다.

물론 일부 기독교 신도들이 제기하는 “통일교가 유엔을 접수했다”라는 주장은 “유태인이 백악관을 접수했다”는 식의 의혹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유엔본부를 언론 플레이에 이용하는 단체나 개인은 통일교 외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2004년 10월13일 황우석 교수는 유엔본부에서 줄기세포와 관련해 기자 회견을 연 바 있다).

통일교, 유엔 대체할 기구 찾아나선 듯

요즘 통일교는 ‘유엔을 접수하려 한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염려와 달리 ‘유엔의 대안’을 만드는 쪽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지난 8월31일 문선명 총재는 ‘천주평화 조국향토 천지환원 서울대회’에서 “유엔은 그 태생적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소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천주평화연합(UPF)이 영적·종교적 측면을 중심으로 기존의 유엔이 다하지 못한 인류 평화 실현에 나서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0월3일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 이상인 평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기존 유엔을 갱신하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차원에서 아벨 격 유엔 기능을 발휘하는 새 국제기구 창설을 제창한다“라며 유엔이 대안 조직을 건설하자고 외쳤다.

 
만약 반기문 차기 사무총장이 정말 통일교 신도였다면 사무총장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유엔 사무총장 후보의 종교는 때때로 선거 캠패인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1991년 부트로스 갈리 이집트 외무장관이 사무총장 후보로 부상했을 때, 미국은 그가 이스라엘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아랍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부담스러워했다. 그럼에도 미국이 그를 6대 사무총장으로 지원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유명한 기독교 집안 에서 자란 독실한 기독교 신도라는 점 때문이었다. 코피 아난 현 사무총장 역시 조지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과 같은 감리교 신자였다. 역대 유엔 사무총장 일곱명중 여섯명이 기독교(천주교 포함) 신도였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종교 없음’은 과연 선거에 유리하게 작용했을까? 그의 유력한 경쟁 후보였던 수라키앗 태국 부총리는 절에서 수도한 적이 있는 불교 신자였고,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카불 대학 총장은 이슬람 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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