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된장녀 그리고 반미주의
  • 고지훈(서울대 강사, 한국현대사) ()
  • 승인 2006.08.0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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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괴물’이 난리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극장을 찾을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우리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탄력을 받아 대박을 터트릴 게 분명하다. 한 영화배우의 표현처럼 “자막없는 괴수영화”를 볼 수 있다니! 자막 읽느라 현란한 영상을 놓치곤 했던 나 같은 관객은 정말이지 “대한민국 만세!”라도 외치고 싶었다. 언어의 동질성, 이건 예술작품을 제대로 음미하는 데에도 필요하지만, 민족주의라는 불꽃을 꺼트리지 않는 무한의 연료이기도 하다. 굳이 ‘괴물’이 아니더라도 한국산 영화는 일단 50점 먹고 들어간다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데 논란은 영화의 ‘반미코드’로 모아지는 것 같다.

영화에 나오는 반미라는 게 사실 별것 아니다. 영화에서 괴물은 미군이 방류한 독극물 때문에 생긴다. ‘카메라 고발’을 조금이라도 눈여겨봤다면, 미군기지의 독극물 방류보다 심각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폐수 방류’라는 걸 잘 알테다. 그런 영화적 장치에 관객의 반미 정서가 자극된다면 남한에는 온통 반미주의자로 넘쳐날 테다. 극장에 안 가도 그런 정보들은 텔레비전과 신문에 지천으로 널렸다. 주한미군의 ‘과실 사고’가 반미주의자를 대량 생산하리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또 미군 철수로 간단히 ‘미국식 제국주의’를 “고홈!”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반미(반제국주의)가 그래서 어려운거다.

‘20세기형 반미’의 역설은 그것이 “초대된 제국”이라는 점이다. 해외 주둔 미군 대부분은 해당 국가의 초대에 응한 것이었다. 우리를 보라! 영향력 관철 방식도 매우 세련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출현했지만 탱크를 앞세웠던 스탈린식 제국주의와는 다르단 말이다(물론 미국도 탱크를 이용 안한 것은 아니지만). 대량의 소비재 상품과 민주주의를 앞세운 ‘미국식 제국주의’는 낯설고도 매혹적이다. 이 새로운 현상에 학자들이 갖다붙인 이름도 다양하다. ‘소프트파워’, ‘달콤한 제국주의’, ‘맥월드(미국의 맥도널드가 전세계에 퍼뜨린 패스트푸드 문화)’, ‘Coca-Colanization(코카콜라식 세계 제패, 미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퍼지는 현상을 뜻함)’ 등등. 이름은 다양해도 지칭하는 현상은 하나다. 인종과 종교, 정치적 신념을 초월하는 쿨~한 라이프스타일, 바로 ‘미국식 삶(American Way of Life)’의 전파다. ‘전지구인의 뉴요커화’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것만 달성되면 테러도 없어지고 독재자도 사라지며 풍요와 자유가 넘치는 지상 낙원이 건설된단다. 결코 실현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얼마나 환상적인 유혹인가?

불가능한 유혹에 항거한 ‘찌질한’ 네티즌

이 불가능한 유혹에 대한 저항가들이 없을 수 없다. 이른바 ‘찌질이’라 불리는 네티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인생에서는 결코 실현되지 못할 저 ‘미국식 삶’의 비현실성에 좌절한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마녀 사냥을 벌인다. ‘섹스 앤 더 시티’ 아니면 드라마 취급도 안하고, 백반 한 끼보다 비싼 스타벅스 커피를 매일 마셔줘야 하며, 명문대생 아니면 일촌 신청은 어림없고, 1주일에 한두번은 미국식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칼질을 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여성들을 “머리에 X만 들어찬 된장녀”라고 빈정거리는 이 시대의 ‘찌질한’ 청년들. 이들의 맹목적 적의를 들춰보면 우리 사회의 온갖 찌질한 구석들이 들어앉아 있다. 청년 실업, 계층 양극화, 도농의 차이, 강남북의 격차, 학벌과 학력 차별, 신자유주의 세계화 등등. 이른바 ‘따라잡기(catch-up) 근대화’를 위해 “하면 된다”만을 외치며 달려왔건만 변치 않는 우리 현실의 ‘찌질함’ 말이다.

눈앞의 찌질한 현실과 쿨~한 뉴요커를 꿈꾸는 그(녀)들의 욕망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이 극복되지 못할 간극에 절망하는 ‘찌질한 청년들’이 만들어낸 ‘된장녀’라는 신조어야 말로 “양키고홈”의 21세기적 변주곡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정녕 반미 정서가 걱정되시거든, 괜히 <괴물>같은 걸작 영화에 시비걸지 말고, ‘인터넷 실명제’나 청년실업 대책을 강구하시는 것이 빠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21세기형 ‘초대받은 제국’은 “고홈”이라고 외쳐댈만한 뚜렷한 실체가 없다. 우리 안에 기생하는, 말 그대로 괴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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