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 찾기 바빠진 '금융 공룡'
  • 이철현 기자 김회권 인턴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6.07.2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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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 일반 금융으로 영역 확장...민간 은행들 '비명'

‘산업은행은 어디로 가는가?’ 이것은 올해 상반기 금융권 최대 화두였다. 한국산업은행이 민간 상업 금융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국책은행 영역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책 금융기관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덩지를 키우겠다는 뜻이다. 산업은행이라는 막강한 경쟁자를 맞이하게 된 민간 금융기관이나 국책은행은 ‘갈 길 찾지 못해 헤매는 산업은행이 좌충우돌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산업은행이 장기 설비 투자나 기술 개발 자금을 공급하는 정책 금융에서 벗어나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나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같은 일반 금융에까지 손대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손실이 나도 산업은행은 세금으로 보전한다. 민간 금융기관 에게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는 산업은행과 경쟁하라는 것은 손발 묶고 싸우라는 소리와 같다”라고 성토했다. 산업은행은 이런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는듯 하다.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는 “금융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기업 금융 수요가 다양해지고 있어 기업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민간과의 경쟁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했다.

산업은행이 지닌 역량은 민간 은행을 압도한다. 산업은행의 자산 규모는 96조5천억원 순이익은 지난해 2조4천억원에 이르렀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이 18.43%로 시중 은행과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민간 금융기관이 ‘금융 공룡’이라 일컫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산업은행을 굳이 공룡으로 비유한다면, 덩지만 크지 두뇌 용량은 토끼밖에 되지 않는 브라키오 사우루스가 아니라 웬만한 영장류 못지않은 지능을 갖춘 ‘벨로시 랩터’라고 해야 할 듯하다. 산업은행은 금융권 최고 인재를 보유하고 있다. ‘신이 내린 직장’이라 불릴 정도로 고용 조건도 좋다. 평균 연봉은 8천만원이 넘고 고용 안정성(정년 59세)도 탁월하다. 이러니 인재가 몰려들 수밖에 없다.

산업은행은 그동안 프로젝트 파이낸싱·회사채 발행·파생 상품·해외 차입 같은 기업 금융 부문에서 국내 경쟁자를 허용하지 않았다. 대우건설·기아자동차·하이닉스반도체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합병·매수(M&A) 시장에서도 1위에 올랐다. 민간 금융기관이나 다른 국책은행이 자기 안마당으로 들어선 벨로시 랩터를 보고 비명을 지를 만도 하다.

산업은행은 과거 국가 경제 성장 전략에 맞춰 한정된 금융 자원을 선택·집중해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부실 기업을 잇달아 인수해 ‘쓰레기 처리장’이라는 탐탁지 않은 별명도 얻었으나 부실 기업들이 연달아 회생하면서 산업은행은 우량 자회사 14개를 거느리고 자산 규모 96조5천억원을 자랑하는 금융·산업 복합 집단으로 떠올랐다. 부실 기업 회생에 따른 지분법 평가이익과 유가증권 처분이익으로 올해 상반기에만 거둔 순이익이 1조2천4백78억원이나 되었다. 대우건설과 LG카드 매각을 앞두고 있어 유가증권 처분이익 규모는 더 커질 전망이다. 올해 순이익은 2조5천억원을 상회할 것으로 점쳐진다.

이 와중에 산업은행이 ‘정체성의 위기’에 빠졌으니, 선뜩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1954년 창립 이후 최고 전성기를 맞은 산업은행이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구조조정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산업은행은 할 일이 애매모호해진 측면이 있다. 과거에도 정책 금융기관이라는 명쾌한 역할이 있었으나 이제는 정책 금융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해졌다. 과거와 달리 부동자금이 4백조원을 넘을 정도로 시중 유동성도 풍부해져 자원 배분 기관으로서 필요성도 적어졌다. 김용범 재경부 은행제도과장은 “정책 금융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할 시점이다. 과거 개발·설비 금융이라는 정책 금융 정의가 명확했으나 이제 경제 성장과 금융 시장 환경 변화에 따라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단 산업은행은 스스로 갈 길을 찾아나섰다. 국내 금융기관이 위험(리스크)이 커 엄두를 내지 못하는 영역이나 재원 부족으로 손길이 못 미치는 부문에 진출하고 있다. 허문회 산업은행 종합기획부장은 “민간 은행이 주택담보대출처럼 위험이 적고 자금 회수 기간이 짧은 곳에 자금을 집중하다 보니 장기 설비 투자나 기술 개발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기관이 줄고 있다. 산업은행은 성장 동력이나 신기술 업종처럼 리스크는 크지만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곳에 자금을 집중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또 남북경협기금이 아우르지 못하는 북한 진출 중소기업을 상대로 설비 금융을 지원한다든지 대외협력기금이 미치지 못하는 플랜트 수출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할 계획이다. 산업은행이 다른 국책 은행인 수출입은행과 마찰을 빚게 된 것은 이에 그치지 않아서다. 수출입은행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해외 자원 개발이나 장기 무역 금융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산업은행은 금융권 안팎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형국이다. 산업은행은 국책은행 축소 재편이나 민영화 방안이 흘러나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허문회 부장은 “한국은 5년마다 격심한 산업구조조정 과정을 겪었다. 산업은행은 구조 조정 작업을 떠맡아 한국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데 기여했다. 앞으로도 산업구조조정은 찾아올 것이므로 산업은행은 지금과 같은 위상과 역할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산업은행은 싱가포르 테마섹처럼 글로벌 투자 은행으로 성장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아시아 전역으로 개발 금융을 확대하고 아시아 부실 채권 시장에도 진출하겠다는 것이다.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는 지난해 10월1일 “(산업은행은) 국제 투자 은행으로서 국제 무대에서 경쟁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동독 자산 인수나 투자 업무를 수행한 독일 KFW처럼 남북 통일 에 대비해 북한 개발 사업을 주도하겠다는 뜻도 숨기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국책 은행 역할 재조정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임기 종반을 치닫는 지금 이 공약이 임기 내에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재정경제부는 당초 올해 안에 산업은행의 위상과 역할을 재조정하는 방안을 마련할 작정이었지만, 계획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박병원 재정경제부 1차관은 “(산업은행을 포함한 국책은행 역할 조정 작업은) 한두 해에 마무리해야 할 과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재경부 용역을 받아 ‘3대 국책은행(산업은행·수출입은행·중소기업은행) 개편 방안’을 연구하고 있는 손상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도 “올해 10월이 되어야 연구 보고서가 나올 듯하다. (산업은행 개편 방안에 관련한) 논의가 내년에는 이루어질 수 있으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라서 정권 말기에 추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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