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와 고독 먹고 뛰 는 ‘절대자’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6.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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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심판, 판정 시비 ‘원죄’ 벗을 길 없어…패한 팀 선수·팬 의 ‘분노 배출구’ 노릇도 해야

 
체코와 미국의 경기가 열린 도르트문트 경기장에서 만난 ‘골 넣는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41·파라과이). 그는 “골키퍼는 외로운 직업이다”라고 말했다. 현역 시절 무려 62골을 넣고 골키퍼로서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화려한 플레이를 한 그에게서 나온 다소 의외의 대답이었다. 잠시 후 칠라베르트는 단서를 달았다. “심판을 제외하고는 골키퍼가 가장 외롭다.”

그의 말대로 심판은 외롭다. 축구에서 만장일치를 이루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모두가 심판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증오와 야유를 받는 것이 심판에게는 숙명이다. 패배자들은 언제나 심판 때문에 진 것이고, 승리자들은 심판이 있었지만 이긴 것이다.
심판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주 드물게 박수를 받은 심판이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 말 우루과이에서 중요한 경기가 있었다. 그런데 경기 전날 우루과이 최고의 심판으로 평가받던 주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경기 시작 전에 그녀의 넋을 기리는 묵념이 거행되었다. 경기장 사회자는 괴로운 상황에서도 꿋꿋히 임무를 완수하려는 심판의 모범적인 스포츠맨십을 찬양한다고 말했다. 심판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그는 전에 없던 대접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한 지 15분이 지나고 그가 오프사이드로 골을 인정하지 않자, 관중은 고인을 기억해냈다. “에라, 이 에미없는 자식아!”

심판은 그라운드에서 절대적 권한을 갖는다. 호루라기 하나로 그라운드의 모든 움직임을 작동할 수도, 막을 수도 있다. 이 전능한 지위를 가진 심판에게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할 책임이 있다. 경기를 원활하게 진행하는 것이 심판의 첫 번째 역할이다. 1964년 축구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은 심판 판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964년 페루 리마에서 페루와 아르헨티나가 맞붙었다. 경기 종료 직전 주심이 페루의 골을 무효로 선언하자, 관중이 일제히 일어나 운동장에다 물건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경찰이 관중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면서 3백명 이상이 뒤엉켜 숨졌다. 이 일로 며칠간 시위가 뒤따랐다. 이 시위는 정부와 경찰을 향한 것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항의였다.
경기 진행 못지않게 심판의 중요한 역할은 경기에 진 선수와 관중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배출구 노릇을 하는 것이다. 만약 심판이 없었다면 그 많은 패인과 실수의 알리바이를 만드느라고 선수와 팬들은 경기마다 머리를 싸매야 할 것이다. 심판을 극도로 증오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존재가 필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심, 경기당 14~15km 뛰는 ‘중노동’

경기장에 있는 듯 없는 듯 경기를 운영해야 하는 월드컵 ‘판관’ 자리는 과거에 비해서도 몇 배는 더 어려워졌다. 우선 체력적으로 그렇다. 정확한 판결은 심판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현장을 포착하느냐와 직결된다. 때문에 월드컵 심판에게 체력은 필수 조건이다. 실제 경기에서 주심은 평균 14~15㎞, 부심은 6~7㎞를 뛴다. 미드필더가 평균 12㎞ 정도 뛴다고 하니 심판의 체력 소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월드컵 심판의 연령 제한도 만 45세 이하로 낮춰졌다.
선발된 심판들은 심판 체력 테스트인 ‘쿠퍼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심판들은 2천7백m를 12분 내에 주파한 뒤 다시 50m를 7.5초 안에 뛰어야 한다. 주심의 경우 2백m를 32초 안에 주파하는 시험을 두 번 더 치른다. 이후 혈압·심전도·청력·시력·치아 검사 등 무려 17가지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여기에는 체지방 측정도 포함되어 있다.

경기장에서 심판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선수들의 연기력이 몰라보게 향상됐다는 점이다. 몇몇 선수는 페널티 지역에만 가면 마법에 걸린 듯 슬라이딩을 해댄다.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토티, 네덜란드의 아르연 로번, 코트디부아르의 디디에 드로그바 등이 대표적인 ‘연기파’ 선수들이다. 또한 아프리카와 중동 선수들은 전통적으로 연기력이 좋다. 강력한 왼발 슛을 날리는 브라질의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축구는 전쟁이다. 일단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 상대 팀 누군가 페널티 지역에서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나는 기꺼이 넘어지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와 호주의 16강전. 경기 종료를 불과 몇 초 남기고 이탈리아의 파비오 그로소가 페널티 지역을 돌파하다 호주 수비수 루커스 닐과 뒤엉켜 넘어졌다. 칸탈레호 주심은 페널티킥을 주었고 이탈리아는 승리를 따냈다. 하지만 느린 화면으로 확인해보면 닐이 그로소의 발을 건 것이 아니라 그로소가 넘어져 있던 닐에게 걸려 넘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편에서 생각해보면 그로소에게 ‘할리우드 액션’에 대한 옐로카드를 줄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프란츠 베켄바우어 독일월드컵 조직위원장은 “심판이 이탈리아에 선물을 준 것이다. 이탈리아는 월드컵에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제축구연맹은 파울을 유도하는 할리우드 액션(시뮬레이션)에는 경고를 주어 제재하고 있다. 하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선수들은 가벼운 접촉에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나뒹굴기 일쑤다.

연기파 선수들에게 속기 일쑤

 
심판도 사람이므로 실수를 할 수 있다. 아무도 90분 내내 경기장 전후좌우를 완벽하게 볼 수는 없다. 비록 무선 송신기와 호출기를 이용해 부심과 연락한다지만 이 또한 완벽하지 않다. 또 주심이 무리하게 옐로카드나 페널티킥을 주어서 경기 흐름이 바뀌었다면 다음 판정은 상대편에게 유리하도록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팬들은 심판이 오심을 내린 뒤에는 늘 무시무시한 음모가 자리하고 있다고 단정한다.
경기장을 샅샅이 훑고 있는 스물 다섯 대의 카메라를 통해 느린 화면을 돌려보는 축구 팬들은 심판보다 훨씬 우월한 위치에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이로 인해 심판의 설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심판의 자리마저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심판 김광종씨는 “축구가 존재하는 한 심판 판정을 둘러싼 시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심판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월드컵이 전세계 축제에서 갖는 비중이 커진 까닭일까. 월드컵에서 심판들은 갈수록 비난을 많이 듣고 있다. 특히 독일월드컵은 심판의 오심 논란이 역대 그 어느 월드컵보다 가장 뜨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월드컵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16강전에서 무려 열여섯 장의 옐로카드가 양팀 선수들에게 주어지고 이 가운데 네 명의 선수가 퇴장 당했다. 월드컵 사상 최고 기록이다. 이쯤되면 축구 경기라기보다는 차라리 격투기에 가깝다. 경기가 카드를 남발하는 ‘카드 게임’이 된 것은 이바노프(러시아) 주심이 반칙 휘슬을 불어야 할 때를 놓쳤고, 그 기준 또한 춤을 추어 경기가 과열되었기 때문이다. 심판의 자질이 경기 진행에 얼마나 중요한 열쇠가 되는지를 보여준 대목이다.
그레이엄 폴(잉글랜드) 주심은 호주-크로아티아전에서 한 선수에게 옐로카드 두 장을 주고도 퇴장시키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판정을 내렸다. 심판은 그 선수에게 세 장의 옐로카드를 준 뒤 내보냈다. 그레이엄 폴 주심은 “심판은 그라운드에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번 월드컵 후 국제경기 심판을 하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한국, 스위스전 오심 논란 끝내야

지난 6월29일 국제축구연맹 심판위원회는 8강전 이후 독일월드컵 경기에 나서는 심판 조를 발표했다. 논란을 제공한 이바노프와 그레이엄 폴 주심은 월드컵 출전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한국과 스위스의 경기를 진행했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라시오 엘리손도 주심과 다리오 가르시아·로돌포 오테로 부심은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8강전 경기를 진행했다. 한국에서는 호라시오 엘리손도 주심의 판결을 희대의 사기극으로 단정하고 있지만, 국제축구연맹은 무리 없는 판결로 본 것이다.
사실 독일 현지에서는 한국과 스위스 경기의 판정이 오심 축에 들지도 않는다. 오심이 아니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한국 여론은 명백한 오심이라며 승복하지 않고 있다. 오심 논란의 중요한 대목은 부심이 오프사이드 깃발을 들었지만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는 것인데, 호루라기 소리가 경기를 중단시키기 전에 선수들이 플레이를 계속하는 것은 기본이다. 한국 선수들은 이 기본을 지키는 데 약간 부족했다.

한국으로서는 억울할 수 있지만 경기는 끝났다. 박지성 선수의 말처럼 심판(오심)도 경기의 일부분일 뿐이다. 딱히 심판의 판정 때문에 스위스전에서 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런데 일부 축구 팬들은 경기 직후 ‘5백만명이 서명하면 재경기를 할 수 있다’라며 확인되지 않은 말을 퍼뜨렸다. 심판의 판정 때문에 경기가 무효가 되고 재경기가 열린 전례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월드컵은 석 달이 넘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국제축구연맹에 공식 항의하겠다”라고 말했지만 이는 국민 여론을 의식한 정회장이 제스처를 취한 것이지 재경기와는 상관이 없다.
인터넷 강국 한국의 축구 팬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제축구연맹 홈페이지를 마비시켰다. 국제축구연맹은 결국 한국에서 들어오는 IP 주소를 차단해야 했다. ‘안티 스위스’ 운동까지 벌어졌다. 스위스 대사관·스위스 관광청, 심지어는 재스위스 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도 ‘사이버 테러’를 가한 것이다.

꼭 4년 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브라질과 터키 경기에서 히바우두가 할리우드 액션으로 터키의 하칸 윈살을 경기장 밖으로 쫓아냈다. 주심을 맡은 한국의 김영주 심판(49)은 터키 사람들의 공적이 되어 곤욕을 치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터키에서는 한국 제품 불매 운동까지 일어났다. 터키가 4강에 진출하자 김영주 심판과 한국에 대한 분노는 잠잠해졌다. 당시 국내 팬들은 터키 축구 팬들의 후진성을 꼬집었다. 또 16강전에서 우리에게 패한 이탈리아 팬들이 당시 주심이었던 모레노 씨를 괴롭힌 것을 ‘속 좁은 짓’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 축구 팬들이 국제 축구계에서 당시 터키와 이탈리아 팬들보다 더 큰 비웃음을 사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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