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미군 OK” 주민 “미군 NO”
  • 모스크바 · 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6.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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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 ‘반대 시위’ 확산

 
'양키 고우 홈!'의 거친 함성이 마침내 옛 소련의 영토에서 울려 퍼졌다. 미·우크라이나 합동 군사 훈련을 위해 우크라이나 크림(크리미아) 반도에 상륙한 미군이 이곳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것이다. 나아가 반미(反美) 시위는 반(反)정부 투쟁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소련 붕괴 이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東進)을 우려해온 러시아는 이웃 우크라이나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지난 5월 말 미군 화물선 ‘어드밴티지’는 흑해에 인접한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페오도시야 항에 도착했다. 오는 7~8월로 예정된 미·우크라이나 합동 군사 훈련(작전명 ‘시 브리즈(Sea-Breeze)-2006’)에 필요한 군 장비를 반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들은 뜻하지 않게 거센 항의 시위와 맞닥뜨렸다. 페오도시야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에 나토는 없다’라는 슬로건이 담긴 피켓 시위를 벌이며, 미군의 군 장비 반입을 거세게 반대했다. 군 장비는 겨우 항만에 하역되었지만, 작전 지역으로의 이동은 지연되고 있다. 시위대들이 철야로 장비를 감시하며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심페로폴(크림 자치구 수도) 공항에 도착한 미국 해병 선발대도 고초를 겪었다. 이들 선발대는 당초 국방부 산하의 사나토리아(휴양소)에 머무를 계획이었는데, 공항에 포진하고 있던 청년 시위대들이 이들을 태운 운송 차량을 완강히 저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때문에 차를 멀리 우회 운영해 시위대를 따돌린 다음에야 가까스로 내무부 산하의 ‘드루지바(우정)’ 사나토리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일 계속된 주민들의 시위 때문에 다시금 숙소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위를 맨처음 주도한 측은 우크라이나 진보·사회당(PSPU) 열성 당원들이다. 시위대 대표인 나탈리야 비트렌코는 ‘미군의 우크라이나 진입은 나토의 동진이며 외국군 주둔은 라다(의회)의 특별 승인을 받지 않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라다 나토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올렉 자루빈스키는 “지난 2월 라다는 외국군 주둔과 다국적군 합동 훈련에 관한 법안을 표결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시위에 가세한 공산당은 아나톨리 그리첸코 국방장관과 보리스 타라슉 외무 장관의 사임과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의 탄핵을 언급하며 정권 핵심부를 압박했다.

진보·사회당이나 공산당은 정치적 힘이 약하다. 하지만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강력한 지역당이 이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정치적 파장은 커지고 있다. 지역당은 지난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휩쓸고 의회 내 제1당이 되었다. 더구나 친러시아 성향인 야누코비치는 2년 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부정 선거 논란과 여기서 촉발된 ‘오렌지 혁명’으로 유셴코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당시 서방은 물심 양면으로 ‘오렌지 혁명’을 지원했다. 이른바 야누코비치는 유셴코와는 앙숙지간이며, 서방과의 관계가 껄끄럽다. 때문에 그가 미·우크라이나 합동 군사 훈련에 관한 법안을 거부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시위는 반입 장비에 대한 논쟁이 야기되면서 가열되었다. 당초 국방부는 1백50자루의 자동소총과 사격장 현대화에 필요한 건축 자재가 반입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시위대가 하역된 컨테이너를 뜯어본 결과 발표와는 달리 다양한 종류의 소총, 폭발물, 가스 기관총, 독극물 등이 쏟아져 나왔다. 반입 장비의 실체가 폭로된 후 키예프(우크라이나 수도)와 나토의 협력이 진정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주민들의 의구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토착 세력인 카자키(코작)들은 나토 장비의 사격장 반입을 막겠다며 사격장 봉쇄 작전에 돌입했다.

“유센코가 러시아와 결별할까 봐 훈련 반대”

크림 반도는 지정학적·전략적 요충지다. 흑해(검은 태풍을 몰아오는 바다)와 인접한 이곳은 지중해를 통해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카프카즈(코카서스)를 거쳐 중앙 아시아로 진출하는 길목이다. 또 아조프 해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지척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옛 소련은 이곳 세바스토폴을 흑해 함대의 거점으로 삼고 흑해에서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서부 해안까지 진출해 군사 훈련을 했고, 지금은 러시아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세바스토폴 항은 천혜의 군사 요새다.

크림 반도에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해군으로부터 이양받은 두 곳의 훌륭한 사격장도 있다. 이 중 이번 훈련이 예정된 ‘스타로(舊) 크림 사격장’은 옛 소련 시절 어뢰 무기의 최대 시험장으로서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는 물론, 우주 관측도 가능한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다. 러시아측은 나토가 이 사격장을 수시로 임차·사용했음을 의심치 않는다. 이 외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오프크 산기슭에 위치한 사격장도 수준급이다.

크림 반도의 역사는 복잡하다. 멀리 몽골의 지배로부터 폴란드에 대한 항전, 그리고 19세기 중반 러시아와 터키의 영유권 쟁탈까지 파란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세기 말 오스만 터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크림 반도는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었고, 이후 1954년 후르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우크라이나에 양도하기 전까지 러시아 연방에 속한 자치구였다.

1997년 이래 우크라이나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과 수차례 합동 군사 훈련을 해왔지만, 반대 시위에 부딪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침묵을 지켰던 이곳 주민들이 이번 훈련을 완강히 반대하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전 흑해함대 사령관 에두아르드 발틴은 “크림 주민들은 유셴코 정권이 러시아와의 거리를 점차 넓혀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곳 거주민의 주류인 130만 러시아인은 나토군의 크림 반도 주둔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를 심히 악화시킬 것이며, 종국에는 자신들의 거주지를 빼앗을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만일 이번 기회에 주민들이 미군을 크림 반도에서 몰아낸다면, 그들은 자신의 주거지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라고 자신의 소견을 덧붙였다.

지난해 유셴코 정권이 ‘오렌지 혁명’의 조류를 타고 친서방 기치를 내걸고 등장한 이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관계는 불협화음의 연속이었다. 급기야 올 1월1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했고, 이에 맞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흑해 함대의 크림 반도 주둔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에너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압박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다. 하지만 러시아가 흑해 함대의 거점인 세바스토폴을 상실한다면 ‘군사 강국'으로서의 위상이 위축될 것은 분명하다.

크림 반도에 대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해법은 동상이몽이다. 우크라이나는 나토군을 배치하고 싶어하고, 러시아는 러시아 연방으로의 회귀를 도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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