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들의 유학시대
  • 정기수 기자 ()
  • 승인 2006.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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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쫓겨가는 겁니다 ”

대입 낙방생, 중?고 재학생 해외 유학 크게 늘어

서울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는 한 학부형은 지난 2월 자식교육을 위해 ‘대용단 ’을 내렸다. 올해 고3이 되는 딸과 고등학교에 올라갈 아들을 모두 호주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회사일로 이 나라에 자주 드나들면서 입학시킬 학교의 교장과도 상의, 사전탐사를 면밀히 해놓은 뒤여서 비교적 안심하고 보낼 수 있었다.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을 굳이 외국으로 보낸 이유는 “지옥같은 입시경쟁 속에 있는 아이들을 보기가 너무 가슴 아프고 저러다 원하는 대학을 못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과외비나 유학비용이나 그게 그거 ”

“올 1년 어학연수를 마치고 제 학년으로 편입하게 되면 둘을 합해 1년에 1천만원 가량들 것 같은데 과외비니 뭐니 따지면 여기서도 그만큼은 필요할 겁니다. 거기에 합격되기까지의 부모와 학생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생각한다면 유학비용은 그다지 문제가 안되는 것이지  요 ”

예?체능계를 제외한 일반의 유학자격을 고졸 이상 학력으로 제한하고 있는 현행법에도 불구하고 자유화된 해외여행을 이용, 호주로 유학길을 떠난 위의 사례와 같이 ‘대한민국의 입시제도로부터의 탈출 ’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중?고생 유학이 최근들어 급증하고 있다. 또한 지난 88년부터 크게 늘고 있는 고졸자, 즉 대입낙방생의 유학은 이미 일반화 추세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종래와 같이 일부 공부 잘하고 선택받은 사람들이 석?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유학을 가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 국내 대학입시에 실패한 사람들과 실패를 겁내는 학생들이 외국의 대학문을 향해 떠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유학시대 ’가 열린 것이다. ‘입시 엑서더  스 ’라고도 불릴 만한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일부에서는  ‘도피성 유학 ’ ‘사치성 유   학 ’ 등의 ‘죄명 ’으로 비판하고 있으나 해당 학부모들은 “재수해서 들어간다는 보장도 없고 고졸로는 사람대접도 못받는데 방법이 없지 않느냐 ”며 나름대로 항변하고 있다.

 

기진맥진해 학생 스스로 상담실 찾기도

신학기 들어 문교부 재외국민교육과, 한국학술진흥재단 유학상담실, 각종 유학알선업체 등에는 이러한 학부모들의 상담전화가 가히 ‘쇄도 ’한다고 할 만큼 많이 걸려오고 있다. 이들 중에는 외국에 사는 친척의 권유로 자녀 유학을 계획하고 있다는 경우가 주류를 이룬다. “딸이 고3인데 공부 안하면 배겨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정신병에나 걸리지 않을까 두렵다. 이런 환경에서 더 이상 공부시키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이 버리고 싶지도 않다 ”면서 외국의 3류학교라도 보내겠다는 ‘입시지옥’을 실감나게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유학예정자들을 대상으로 출국전에 소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유학상담실에는 “이번에도 또 떨어졌다. 언어준비가 안돼 있는데 유학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 ”는 재수생 부모에서부터 재학생 유학을 상담하는 부모들의 전화가 하루에도 여러통씩 걸려오고 있다. 이 상담실의 박영자과장은 “요즘에는 부모뿐만 아니라 학생자신이 기진맥진한 상태로 찾아와 유학가고 싶다며 상담하러 오기도 한다 ”고 전했다.

이들은 주로 방학중 부모와 함께 여행떠나는 형식으로 해당국가에 가서, 기부금 입학이 쉬운 사립대학을 찾아내고 입학 허가를 얻은 뒤 현지에 떨어져 ‘합법적 ’ 유학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알선업계에 따르면 이같은 중?고재학생 편입유학 사례는 병역문제와 관련이 없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많지만 남학생이라 하더라도 현지에서 재학하고 있다는 증명만 있으면 병무연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재학중 유학은 이처럼 유학목적으로 여권을 받는 게 아니어서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으나 상담사례에 비추어 부유층을 중심으로 급속한 증가추세에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이보다 훨씬 많은 고졸자의 유학은 이제 보편화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해졌으며 수적인 면에서 올해는 기록적인 해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학술진흥재단의 소양교육필자를 기준으로 고졸유학생수의 변화를 보면 유학문호가 크게 열렸던 80년대초 2백∼5백명에 이르던 것이 ‘사치성 ’ ‘도피성 ’이란 비난 여론으로 된서리를 맞고 자격제한도 강화돼 86, 87년에는 50여명 수준으로 뚝 떨어졌었다. 그러나 해외여행자유화 바람으로 ‘고졸 상위 10% 이내 ’ 제한요건이 없어지면서 크게 늘어나 88년 4백여명, 89년 작년에는 무려 9백여명이나 유학을 떠났다.

 

호주 유학 설명회 ‘대성황 ’

이러한 고졸유학생수의 증가는 대재?대졸자 유학이 최근 감소추세에 있는 현상과 대조적으로 작년에는 전체유학생수 6천여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5.3%로 나타났다. 여기에 변칙유학자, 이를 테면 ‘토플없이 ’ 조건부 입학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부과되고 있는 자비유학시험에 떨어질 경우 일부 알선업체를 통해 토플성적을 위조하여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을 합하면 작년에만 1천∼1천5백명의 고졸자가 출국한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는 이 숫자의 약 배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것은 지난 2월말에 있었던 ‘호주유학 설명회 ’의 대성황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설명회를 주관했던 주한호주대사관의 손민경 유학상담관은 “3일 동안의 설명회기간중에 몰린 3천~3천5백명 중 약 40%가 고졸자의 경우였으며 중?고 재학생 유학상담도 예상보다 크게 많았다 ”고 밝혔다.

신설대학들의 재정확보 목적으로 이루어진 이번 설명회로 호주유학에 대한 홍보효과를 톡톡히 얻고 있는 대사관측은 요즘에도 ‘붐 ’이라고 할 만큼 유학상담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뤄 고졸자만 올해 1천여명을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호주가 이처럼 각광받고 있는 것은 적극적인 홍보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비와 생활비가 미국의 70∼80%(문과의 경우 연가 9백만∼1천만원)로 싼 데 이유가 있다고 알선업계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고졸유학생의 급증현상은 유학원등의 알선업체나 어학원과 같은 유학관련업계의 ‘호황 ’에서도 나타난다. 현재 70여개가 성업중인 각종 알선업체들은 고졸자유학을 ‘신종상품 ’으로 내놓고 손님을 모으고 있으며 일부업체는 ‘국내 과외비용으로 외국 중?고교 편입  학 ’이란 선전을 하며 재학생유학도 알선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미술대학 입학알선을 올해 처음으로 시작, 지난 3월 ‘전화위복의 계기 ’를 선전하며 대입낙방생들을 모집한 한 업체의 경우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 대전에서까지 부유층 여학생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1차 프로그램 정원 30명을 간단히 채웠다. 또 어학원들은 토플성적이 안되는 고졸자들이 자비유학시험을 거쳐야 하는 점을 노려 3개월 1백50만원짜리 ‘고졸자특별반 ’을 다투어 운영하고 있다.

이같은 관련업계의 성업은 재수의 공포에서 헤어날 수 있는 출구를 찾는 대학입시 낙오병들과, 국내에 비해 2배 가량이 더 드는 유학비용을 개의치 않는 부모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수험생과 부모들의 눈에 결코 좋게 보일 일은 아니나,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비난만 할 일도 못되는 것이, ‘자기나라의 제도가 싫어 남의 나라로 떠나는 ’ 참으로 착잡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발 ‘도피유학’으로 보지 말아달라 ”

서울 강남의 ㅁ어학원에서 만난 장모(20)군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보니 내신등급이 9등급으로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모두 5곳을 시험봤으나 전문대에서도 떨어졌다. 공부하고 싶은데 합격시켜주는 곳은 없고 결국 부모님과 상의해 유학을 택하기로 했다. 이제 막판이다. 이번 자비유학시험에 떨어지면 군대에 가야 한다 ”고 말했다. 그는 “우리집이 가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부모님이나 나나 원했던 것은 국내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제도가 나를 버렸을 뿐이다 ”라고 하면서 제발 ‘도피유학 ’으로 보지 말아달라고 몇번씩이나 부탁했다.

장군과 같은 학생들과 그들의 학부모들에 대한 비난과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 중 어느것이 우선돼야 할까. 해외여행자유화의 시대에서 그러한 비난은 과연 적절한 것일까.

지난해 모두 1만여명으로 파악되는 유학생들의 경비는 약 1억5천만달러. 이에 비해 해외여행자들이 놀러다니며 외국에서 써버린 돈은 20억달러를 넘고 있다. 낭비로 따지면 무엇이 더 낭비이고, 사치라고 손가락질 받는다면 어느 쪽이 더 받아야 할지 판단하기에 어렵지 않다.

더구나 80년대초 미국교포사회에서 물의를 빚었다고 보도된 한국유학생 ‘호화파티 ’의 사례가 그후 무려 10년 동안이나 각 언론에 반복 인용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우리 사회는 유학생에 대해 어떤 단단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까지 한다.

“당시의 보도가 사실인지 정부로서는 확인하지 못했으며 그 이후 비슷한 사례가 보고된 적도 없었다 ”고 애써 언급을 회피하는 문교부의 한 관계자의 말투에서 이러한 편견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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