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70년,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
  • 정용탁(한양대교수ㆍ영화평론가) ()
  • 승인 1989.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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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義理的 仇鬪>에서 1989년 <달마가…>까지

1919년 10월27일 단성사에서 공연중이던 <義理的 仇鬪>라는 연쇄활극의 야외장면을 위해 기차와 한강다리 등을 金陶山이 10분짜리 활동사진으로 찍어 연극공연 중간에 상영했다. 또 이 공연장에서는 <京城全市의 景>이라는 서울풍경을 담은 10분짜리 기록영화도 상영했다. 비록 일본인들이 촬영한 영화이긴 하지만 한국인들이 기획 연출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들의 개봉시점을 한국영화의 탄생이로 보고 있다.

 한국의 근대사가 그러하듯 한국영화 70년사도 파란만장한 고난사이다.

 3ㆍ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은 세계영화사적 측면에서 보면 無聲영화의 形式美나 技法의 성숙기이자 스타 시스템의 대두와 영화산업의 형성기이며 레닌에 의해 영화의 선전성이 인식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무렵에야 우리나라에서는 영화를 연쇄극의 일부로서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뒤진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된 한편의 극영화형식을 갖춘 영화가 나온 것은 尹白南의 <月下의 맹서>(1923)인데 이 작품은 조선총독부의 체신국에서 제작한 저축장려 계몽영화였다.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제작진에 의해 촬영된 최초의 영화는 <장화홍련전>(1924)이다.

 한국영화 70년사를 물리적 형식으로 분류해 본다면 무성영화시대와 유성영화시대 (35년 <춘향전>부터), 표준화면영화시대 (50년대까지)와 와이드화면영화시대 (58년 <생명>부터), 흑백영화시대와 컬러영화시대 (49년 <여성일기>부터; 컬러영화가 일반화된 것은 60년대 중기 이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치적 변혁기 중심으로 분류한다면, 일제치하의 한국영화, 해방 이후 6ㆍ25 戰時中 영화, 6ㆍ25이후 유신정권 이전 영화 (50∼60년대), 유신 이후 5공화국영화 (70∼80년대)로 구분지을 수 있겠다. 이 후자의 구분법은 영화가 어느 예술보다도 정치권력의 통제를 많이 받아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결과 작품의 주제나 소제에 막대한 영향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한국영화에서는 매우 유용한 시대구분일 수 있다.

 식민지 치하의 무성영화는 일본식 신파조 통속영화 <낙화유수>(27)나 古典 각색물 <심청전>(25), 羅雲奎식의 멜러드라마의 기둥줄거리에 민족적 저항의식을 담은 항일영화 <아리랑>(26) <사랑을 찾아서>(28), 유치한 활극영화 <사나이>(28), 金유명같은 傾向派 감독의 경향영화 <유랑>(28) 등을 들 수 있다. 무성영화시절의 업적이라면 羅雲奎와 같은 위대한 영화작가의 탄생과 비록 대중의 호응은 못받았지만 사회의식을 영상에 담은 경향파 감독들의 등장이다.

 1935년 <춘향전>으로 토키의 시대는 열렸으나 일부 작품은 해방기까지 무성으로 제작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全昌根이 항일영화 <복지만리>(41)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1백여일 구속된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일본어 녹음과 대동아전쟁 참전고취영화 제작이 동시에 강요되었다. <젊은 모습>(43)은 그런 영화의 전형이다.

 해방 이후에는 일제식민지시대를 재조명 또는 비판하는 영화,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한 멜러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었다. <자유만세>(46)가 그 전형이다.

 한국영화의 최전성기는 한국전쟁 이후 유신시대 이전인 50∼60년대라 할 수 있다. 장르의 다양화와 제작편수의 증가 그리고 작품의 질적 향상과 이에 따른 관객의 증가로 한국영화는 황금기를 구가했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에 제작된 극영화가 1천3백72편이란 것을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60년대 영화의 특징으로는 ①申相玉의 <연산군>(61) <대원군>(68) <성춘향>(61) 등과 같은 일종의 사극 ②劉賢穆의 <순교자>(65) 金洙容 <안개>(67) <갯마을>(65) 申相玉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61)와 같은 소설각색물 ③6ㆍ25를 소재로 한 李晩熙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63)등과 같은 전쟁물 ④劉賢穆의 <춘몽>(65) 申相玉의 <내시>(68) 李亨杓의 <너의 이름은 여자>(69) 朴宗鎬의 <벽 속의 여자>(69)와 같은 성애물 ⑤감상적 멜러드라마 ⑥슬랩스틱 코미디 ⑧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金綺永의 <하녀>(60)와 같은 여성의 이상심리를 다룬 추리극 등을 들 수 있다.

 70년대에 유신체제로 사회가 경색되면서 영화산업의 영세성과 난립을 막는다는 구실로 정부는 영화법을 개정하고 영화진흥공사를 신설, 20개 영화사에만 영화제작 및 수입의 특혜를 주었다. 진흥공사는 유신이념구현 및 반공ㆍ새마을영화를 제작했으나 대부분의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자 그 기능을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미끼로 민간업자에게 떠맡긴 것.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생명력과 상업적 자생력을 잃었다. 70년대는 한국영화의 암흑기였다. 70∼80년대에 등장한 주목할 만한 감독들로는 林權澤(만다라,) 李斗鏞(피막), 河明中(땡볕), 李長鎬(어제 내린 비), 裵昶浩(깊고 푸른 밤), 金鎬善(영자의 전성시대) 그리고 최근 주목받고 있는 裵鏞均 감독 등이다.

북한영화 : 북한영화이건 한국영화이건 그 뿌리는 <의리적 구투>이다. 그러나 북한은 그들 영화사의 뿌리를 해방 이후 북한에서 만든 기록영화 <우리의 건설>(49) <내고향>(49)에 두고 있다. 북한 영화사가들은 해방 이전 항일 민족혼이 담긴 영화까지 모두 묵살한 것이다. 북한은 해방직후 당중앙위 선전선동부에 영화반을 창설한 후 영화제작소를 다시 조선예술영화촬영소(1947)로 격상시켰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극영화는 <내 고향>인데 6ㆍ25동란으로 영화시설이 파괴된 이후 소련의 원조를 받아 복구되었다. 북한에는 현재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조선기록영화촬영소’ ‘조선과학영화촬영소’ ‘중공업위원회촬영소’ ‘2ㆍ8영화촬영소’ 등의 영화제작소가 있다. 북한에서는 극영화를 예술영화라고 부른다. 극영화는 ‘조선예술영화제작소’에서 연간 30여편을 만드는데 내용별로 보면 혁명전통물 30%, 전쟁물 30%, 사회주의건설물 20%, 적화통일물 20% 등이다. 북한영화의 카테고리는 金日成이 64년 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행한 교시 <혁명교양, 계급교양에 이바지할 혁명영화를 더 많이 만들자>와 66년 영화문학작가(시나리오작가)와 영화연출가(감독)에게 내린 교시 <깊이 있고 내용이 풍부한 영화를 더 많이 창작하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성 과다로 인한 북한영화의 해외진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가 崔銀姬ㆍ申相玉 사건이었다. 申相玉이 북한에서 만든 <돌아오지 않는 밀사>(84)는 체코의 ‘카를로 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또 그가 만든 <소금>(85)으로 崔銀姬가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다.

 북한영화의 최대 문제점은 영화인들의 자질문제나 시설문제보다는 金日成부자의 映畵觀인 ‘의도적 정치선전화’라 할 수 있고 한국영화의 과제는 표현자유의 신장 그리고 지나친 상업성을 극복하는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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